4수까지 했는데 휴학을? 딸아, 아빠 말 좀 들어보렴

[공모-가족인터뷰] 진로때문에 생긴 부녀 갈등, 훈훈한 마무리

등록 2013.09.04 13:39수정 2013.09.04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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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집 분위기는 폭풍전야처럼 긴장된 날들을 보내고 있다. 분명 한 차례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리라는 것은 알고 있으면서도 그때를 몰라 답답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크다. 그러다보니 마음이 붕 떠 있어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를 때가 많다.


그 주된 이는 남편과 큰아이, 원인은 큰아이의 2학기 휴학이다. 올해 25세인 큰아이는 대학 3년생이다. 원래의 나이로 보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해서 사회인이 되었거나, 휴학을 했더라도 졸업반이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재수, 삼수, 사수를 겪고 대학생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뜻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원하는 대학교에 가야 한다는 의지로 재수는 필수로, 삼수는 선택으로 사수는 남자들 군대 갔다 온 셈 친다며 책상 앞을 떠나지 못하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 한구석이 아려온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에 욕심이 많던 큰아이는 모범생에 우등생으로 든든함을 갖게 했다. 그런 아이가 공부 때문에 번번이 발목을 잡힌다는 사실에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지켜보는 것 밖에는 별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대학생이 되고 난 후에는 남들보다 늦었다는 조바심에 조기 졸업을 목표로 학업에 전념하던 큰아이가 돌연 겨울 방학 때 고시를 보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는 방학 동안 한국사 시험공부를 하더니 1급을 받아 시험응시 자격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들어가더니 여름방학 때는 2달 동안 제2외국어공부를 시작했다. 거기에 하루 계획표를 세워 지켜 나가고, 그러더니 급기야 2학기 휴학을 하겠다고 선언을 했다. 그러자 남편이 휴학은 무조건 안 된다고 반대를 했고 그 후로 지금까지 서로 눈길조차 마주치지 않고 있다.

정순옥
매사 계획적이고 완벽주의자인 남편은 나에게는 까다로워 말 한 마디도 조심해야 하는 어려운 대상이지만 아이들에게는 늘 자상한 아빠였다. 아이들에 대한 것이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알아야 하고,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면 말하기도 전에 해주는, 그렇다고 개방적인 것과는 반대로 고지식해서 옷 입는 것부터 머리스타일까지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이제는 다 자라 자기들만의 가치관이 있는데도 그것까지도 당신이 정해주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가끔 아이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할 때도 있지만 그것도 나에게 하소연 하는 것으로 대신할 뿐, 아빠 앞에서는 내색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우리 집에서는 남편의 말이 곧 법이고 넘을 수 없는 산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큰아이가 아빠의 뜻에 반기를 든 것이다. 그것도 완강하게.


휴학신청 마감이 다가오고, 부녀 사이의 냉한 기운이 더 깊어지기 전에,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라면 갑자기 당하는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풀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부녀의 인터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남편이 모처럼 쉬는 일요일 오후, 우리는 거실 탁자에 모여 앉았다. 텔레비전도 끄고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먼저 미원아. 지난번에 2학기 때부터 휴학하겠다고 말하고 나서 지금까지 변화가 있는지, 아니면 그대로인지, 네 생각을 말해보렴."


내 말에 아이는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남편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엄마, 아빠도 아시는 것처럼 제가 대학생이 되고나서 한동안 아빠가 외무고시 시험을 보는 게 어떻냐고 했을 때는 싫다고 했어요. 그때는 4수할 때까지 그 느낌이 지긋지긋해서 다시는 그런 시험 공부는 안 할 거라고 다짐 했었거든요. 그런데 학년이 올라가면서 선배들이나 주변 친구들을 보니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어요. 물론 제가 영어를 전공으로 하고 있으니 교환학생으로 외국에 다녀오고 나면 취업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대학원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어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제 꿈이 되살아나기 시작했어요.

외교 분야에서 일하고 싶어서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공부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4수까지 했었던 게. 대학교에 와서도 이중전공으로 국제법을 선택한 것도. 고시공부라는 게 수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힘들고 어려워서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지금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겨울방학 때 한국사 시험 준비를 하면서 저도 생각 많이 했어요. 그냥 조기 졸업하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그렇게 사는 것도 좋지만 다른 무엇보다 제가 하고 싶은 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에 고시 준비를 하기로 결심한 거예요. 그때는 아빠도 해보라고, 도와주신다고 하셔서. 이렇게 휴학이 문제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제가 2학기 휴학을 고집하는 것은 방학동안 인터넷 강의로 해온 공부도 두 달 동안 해온 어학공부도 그만둬야 하기 때문이에요."

무표정하게 큰아이의 말을 듣고 있던 남편이 손을 들어 아이의 말을 끊었다.

"그래. 내가 그랬다. 고시시험 준비하면 도와주겠다고. 아빠는 네가 외무고시 시험을 보겠다고 결심한 것도 장하다고 생각한다. 방학 동안 네가 계획표 대로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믿음도 가고, 하지만 말이다. 너는 4수를 했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공부할 시간이 없어. 처음에 아빠가 휴학은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가 네 의견을 받아들여 4학년, 그러니까 내년에 휴학하라고 한 것도 솔직히 백 프로 찬성은 아니었어.

외무고시 합격생 비율을 보면 재학생이 1/3이란다. 그래도 네가 그렇게는 할 수 없다니까. 그런데 2학기부터 휴학은 정말 안 되는 일이야. 보렴. 네가 2015년도 시험을 목표로 공부하는데 본격적으로는 내년부터이고 지금은 어학점수를 얻는 게 목표라고. 그리고 인터넷 강의도 준비단계로 보며 하는 거라고. 그런데 굳이 휴학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2학기라고 해봐야 두세 달인데, 죽기 살기로 마음먹고 학교공부와 병행하면 되잖아. 아빠도 답답해서 전문학원에 상담도 해봤고, 변호사 친구들에게 물어봤는데 모두들 하는 말이 아빠 생각과 같아. 너는 4수 하느라 남들보다 시간을 까먹었으니까 될 수 있으면 효율적으로 공부하라는 게 아빠의 마음이다. 아니면 차라리 졸업을 하고 마음 편하게 시험공부를 하든지. 괜히 걸쳐놓은 듯한 생활은 하지 마라."

남편의 말이 끝나자 큰아이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가 너무 커 행여 남편의 심기를 건드릴까 내가 나섰다.

"아빠 말씀도 일리가 있고, 너도 공부의 맥이 끊어질까봐 걱정도 되고, 휴학하지 않고 학교생활을 하면 학점관리 때문에 학교 공부에 전념하게 되면 자연히 고시 공부도, 어학공부도 못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번 겨울방학 때 다시 시작해야 하니 시간낭비에 돈 낭비라는 네 말도 맞는 것 같고. 그래서 나도 많이 생각해 봤단다. 여보, 나는 그래요. 이번에는 나도
미원이 생각에 힘을 실어주고 싶어요."
"……."

내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동안 아이에게도 아빠의 생각을 은근히 종용해왔던 터라 아이도 놀란 표정이었고 남편 또한 자신의 생각에 대놓고 반대하는 내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이의 고시 시험은 모두에게 쉽지 않은 결정이다. 다른 무엇보다 아이의 나이가 좀 많다는 것, 만만치 않은 공부에 천운이 더해주어 2015년에 합격을 한다 해도 27세이고 아니면 다시 복학해서 졸업을 해도 29세, 그때는 나이 때문에 취업도 쉽지 않을 테고. 그렇다면 결혼은? 아무리 늦어도 30세에는 해야 한다는 생각인데, 막상 결혼을 하려해도 벌어놓은 돈이 없으니,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게 되면…. 그러다가도 다급한 생각에 취업을 목적으로 해도 뜻대로 되지 않아 취업준비생으로 보내게 되면, 그나마 취업을 했다가도 적성에 맞지 않아 이리저리 옮기게 되면….

아이 말처럼 지금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을 평생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이의 말에 힘을 실어주기로 했다. 그렇다고 가진 게 많은 것도 아니고 아이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물려주기 위해 공부 뒷바라지에 모든 것을 쏟아왔는데…. 가끔은 이게 옳은 길인지, 잘 하고 있는 것인지 의구심마저 들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부모의 자리라는 게 얼마나 고단한지, 결국은 내리사랑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음, 당신 생각이 그래? 그럼 왜 미리 나한테 그런 언질을 주지 않았어? 시간이 없었다는 것은 핑계이고, 10분, 아니 5분이라도 나를 붙잡고 이야기를 했어야지. 당신이 그렇게 결정하게 된 이유가 뭔지 궁금하군."
"나도 당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낼 때를 기다렸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가 하고자 하는 힘이 컸고 그동안 집에서 생활하는 모습이 하루 13시간 이상 공부하려고 무던히 애를 쓰는 모습 때문이에요. 4수 하느라 좀 늦긴했지만 그렇다고 서둘러 갈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들고."

말을 하면서 남편의 표정을 살폈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렇다. 지금까지 20여일 동안 휴학에 대해 생각해왔다. 네가 전해준 편지를 통해 네 마음은 충분히 알고 있어. 그래서 내린 결론은 공부에는 정답이 없다는 거야. 그리고 공부한다는데 하지 말라는 부모가 어디 있겠니? 아빠도 실은 문학소년이었단다. 그래서 국문학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할아버지께서 반대를 해서 경영 공부를 하게 된 거야. 그러니 학점도 좋지 않았고 졸업한 후에 취업을 했어도 버티지 못해 여러 곳을 전전했단다. 그러다가 엄마를 만나고 나서 우연한 기회에 공연제작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그곳에서 자리 잡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단다.

제작이라는 게 크게 보면 문학의 범주에 속하거든. 그때는 몸은 힘들어도 하는 일이 즐    거웠단다. 덕분에 엄마가 힘들었지만, 그렇게 10여년을 지방으로 돌고 나서야 제자리를 찾게 된 거야. 먼 길을 돌아온 거지. 그래서 네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너는 나처럼 먼 길을 돌아가지 않기를 말이다. 아빠는 요즘 회사에서도 무척 힘들어. 특히 올해 여름은. 아빠 나이가 그렇잖니. 정년이 내년이다 보니 상대하는 직원들이 모두 어리고, 자리를 지키기에 급급한 내 모습을 볼 때면 이게 뭔가 하는 생각도 든단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두고 싶지만 그럴 때면 이렇게라도 생활하는 게 어디냐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곤 한다.

물론 너희들 때문에라도 그렇고. 그래서 주말에도 굳이 안 나가도 되는데 눈치 보여서 나가는 거야. 또 아빠는 가장 평범한 부류로 이제는 나무에 열매가 맺을 때란다. 주변을 봐도 그렇고. 그런데 도통 열매 맺을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까 답답한 거야. 좀 지친다고 할까?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바빠지더구나. 그래. 미원아, 한번 해보렴.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놔두어도 간다는 말처럼 죽어라고 해서 네가 합격하면 아빠도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구나."

어느새 남편의 목소리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어도 가장이라는 책임이 남편의 어깨를 무겁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미안해졌다. 가끔 힘들어 보일 때도 직장 생활이라는 게 다 그렇다는 식으로 입에 발린 말로 대신했으니.

"아빠……."

큰아이는 빨개진 눈시울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남편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래, 열심히 하렴. 좀 늦더라도 네 삶이 큰 변화가 있는 건 아니란다. 아빠가 기다릴게. 이제는 아빠의 빛이 바랜 회색빛이지만 그 한쪽 끝으로 너의 영롱한 빛이 피어나기를 말이다."

남편은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항긋한 내음이 났다. 행복이라는….
덧붙이는 글 가족인터뷰 응모글.
#가족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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