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내란음모 혐의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2004년 1월 29일 오후 서울고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법정을 나서고 있는 모습
남소연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인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했을 무렵, 야권과 재야의 민주주의 요구가 눈엣가시였던 전두환 신군부는 당시 야권 정치인이자 민주당의 정신적 뿌리라고 볼 수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5월 17일 학생·노조소요관련 배후조종 혐의로 체포했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 인사를 비롯해 학생운동 지도자·노동조합 간부·종교인 등 26명이 중앙정보부에 체포됐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전두환 일당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 씌운 혐의는 '학생소요 배후조종'이었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뜨거운 열망은 신군부에 의해 결코 꺾이지 않았다. 광주시민들의 1980년 5월 17일의 비상계엄해제 요구 투쟁은 역사적인 민주주의 수호투쟁이었던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광주 시민의 피로 얼룩진 이후였던 1980년 7월 4일, 전두환 신군부 계엄사령부는 5·18 광주항쟁의 주동자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목해 그와 사건 관련자 37인을 이른바 '내란음모' 활동으로 기소했다. 이게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이다.
<프레시안>의 보도에 따르면, 당시 계엄사령부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해방직후부터 좌익활동에 가담한 열성 공산주의자였으며 해외에서 북과의 노선에 동조하는 반국가단체인 '한민통'을 만들었으며 이들 불순분자들과 근래에도 접촉해왔다"고 발표했다고 한다. 이들은 2만3000자에 달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공소장을 언론에 일제히 발표했다.
계엄사령부가 주목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활동은 한민통, 즉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의 결성이다. 이미 1977년, 중앙정보부는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의 간부로부터 지령을 받고 국가기밀을 탐지·수집했다는 혐의로 재일동포 유학생들에 구타·물고문·전기고문 등 각종 가혹 행위를 했다. 그 결과, 한민통 소속 재일지도원의 지령에 따라 국내에 잠입해 간첩행위를 했다는 등 허위 사실을 자백한 것이다.
계엄사령부의 주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민통 결성을 준비하고 의장활동을 했다는 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계엄사령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작성했다는 '예비 내각명단'도 압수했다. 이 명단은 군사재판에 사건을 입증할 수 있는 유력한 증거자료로 제출됐다.
당시 계엄사령부는 전남대 복학생이었던 정동년씨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두 차례에 걸쳐 300만 원과 200만 원씩 모두 500만 원을 받았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광주로 내려가 폭동을 일으키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남이었던 김홍일씨를 비롯해 김옥두·한화갑·권노갑 등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인사들도 남산 중앙정보부 취조실로 끌려갔다.
계엄사령부는 군사재판을 통해 1981년 1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른바 '김대중 구명운동'으로 확산돼 정치인 김대중이 해외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고, 내외의 김대중 구명운동에 의해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82년 형 집행정지로 출소해 미국길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역사에 '완전범죄'란 없었다. 이후,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피해자들이 고문에 의한 강압 수사를 받았다는 사실들이 드러났다. 중정 요원들은 김홍일 전 의원에게 "니 아버지가 빨갱이라고 쓰라"고 강요했으며 김옥두 전 의원도 고문당하면서 "김대중이 빨갱이라고 쓰라"고 강요받았다고 회고했다. 고문을 못 이겨 허위자백하였던 정동년씨는 이후 두 차례나 자살을 기도했다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임기를 마친 2003년에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해 2004년, 이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1979년 12·12사태와 1980년 5·18을 전후해 발생한 신군부의 헌정파괴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함으로써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행한 정당한 행위이므로 형법 제20조의 정당행위에 해당, 범죄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2010년 3월 24일, 진실화해위원회는 한민통 간첩조작사건이 수사기관의 강압적인 수사로 조작됐다고 밝혔다. 서울고법 형사8부는 2011년 9월 23일 이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던 김정사와 유성삼이 청구한 국가보안법 위반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과 진보당의 '내란음모'지금의 진보당의 내란음모 조작에 대해 일부 민주당과 국민들은 '사실이라면 큰일'이라며 엄정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이는 정확히 1980년 7월,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이 터졌을 때 "사실이라면 큰일"이라며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던 당시 사회상과 일치한다. 계엄사령부가 계속적으로 터트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한민통 연계성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택에서 나왔다는 '예비 내각 명단'이 그야말로 '사실이라면 큰일'이란 것이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억울함이 지금 통합진보당의 억울함에 비교할 만하다. 1980년, 정작 내란은 누가 저질렀는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신군부 일당은 정권 찬탈을 목적으로 군부대를 동원, 12·12 쿠데타라는 내란을 실제로 도모했다. 부당한 방법으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신군부가 반대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 '김대중 내란음모조작사건'이다.
당시 계엄사령부의 의도는 지금의 국가정보원과 정치적 의도와 완전히 일치한다. 지금 국정원과 박근혜 정부는 2012년 대통령 선거에 국가정보원이 부당하게 개입했으며, 그 사건으로 국정원 해체·대통령 책임 요구가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정원이 안위를 보장하고 정치적 반대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통합진보당의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했을 개연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행동도 없고 조직도 없는 '내란음모'... 취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