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 구여사의 이야기

[공모-가족이야기] 그래, 나 엄마 닮았다

등록 2013.09.03 17:34수정 2013.09.03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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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여행박사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하는 '가족이야기' 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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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알아? 엄마, 그렇게 말할 땐 꼭 외할머니랑 똑같은 거?"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사춘기 아들이 아침부터 한바탕 쏘아 부치고 학교에 가버렸다.

'그 엄마에 그 딸.' 어려서 부터 유난히 바지런하고 싹싹한 나를 두고 동네 어른들이나, 고모들은 그렇게 많이 불렀다. 딸이 엄마 닮아 부지런하고 싹싹하다는 좋은 뜻의 말인데도, 나는 엄마 닮았다는 그 말이 무척 싫었다. 왜 그랬을까?

골목길 지하방, 공부잘하기로 유명했던 류씨 삼남매 중에, 그래서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했던 우리 집 삼남매 중 가장 엄마를 많이 닮은 나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아직도 나랑 똑같은 우리 엄마가 버겁다.

엄마랑 다정히 쇼핑하고, 도란도란 얘기도 하고, 맛난 것도 많이 사먹고. 때론 시댁 험담도 하고, 남편 흉도 보고, 그러면서 같은 여자이자, 인생 선배인 엄마의 달콤한 위로도 받으면서, 그렇게 평범한 모녀지간이 되고 싶었다. 늘...

그러나, 난 늘 엄마가 버겁다. 왜 일까?


삼남매의 막둥이로 태어난 나는 너무도 못생겨서 고모들로부터 '메주뎅이'라고 불렸다. 자타가 공인하는 미남형이었던 아빠완 달리 못생긴 엄마를 겨냥한 시누들의 시집살이 중 하나였다는 걸 알게 된 건 얼마 전의 일이었다. 왜냐면, 늘 우리집에선 날 '작은 선형이' 엄마를 '큰 선형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외할머니는 시집을 가자마자 내리 자식 둘을 낳았으나, 그 당시 제일 무서웠던 호환마마에 걸려 제대로 약 한 번 쓰지 못하고 둘 다 잃었다고 했다. 그래서 매일같이 정한수 한 그릇 떠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병신이어도 좋으니, 곰보여도 좋으니, 이번 자식만큼은 제발 명만 붙여주십시오" 하고 빌었단다. 그렇게 열 달 치성 끝에 낳은 자식이 우리 엄마, 구 여사란다.


외할머니의 기도 때문이었을까? 7남매의 맏이로 태어난 우리엄마는 7남매 중 자신이 제일 못생겼다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지금도 아무도 깨지 않은 새벽에 곱게 화장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부지런하다는 것으로 생각해도 좋으련만... 손자 다섯을 둔 할머니가 된 지금도 젊은 두 딸들보다도 더 곱게 화장하는, 그래서 아직도 좋은 화장품만을 고집하는 것이, 백화점에 가면 노인들 코너가 아닌 30~40대 코너에서 옷을 고르는 것이, 조금은 주책없어 보일 때도 있다. 아직도 여자이고 싶고, 예뻐 보이고 싶은 여자의 본능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라는 게 이해가 잘 안되는걸 보면, 나도 엄마에겐 한참 꼬여있다.

7남매의 맏이로 늘 '동생에게 양보해라'라는 말을 들었다는 엄마는 "중학교만 졸업하고 얌전히 집안 살림 배워서 좋은 곳에 시집이나 가라"는 외할아버지의 말을 어기고 "고등학교 안 보내주면 굶어죽겠다"며 단식 투쟁에 나서 결국 쟁취하고 만다. 지금도 그때 얘기를 하면서 "내가 그렇게 안 했으면, 니네 엄마는 중졸이다"하며 흥분하곤 한다. 그러면서 "대학 갈 때도 그랬어야 하는 건데, 니네 외삼촌이 사고치는 바람에..." 하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한다. 어떻게 매번 토씨하나 안 틀린 똑같은 얘기인데, 똑같은 대목에 다다를 때마다 똑같이 흥분하고, 똑같이 억울해 하는지... 이런 걸 보고 '한'이라고 하겠지. 그 못 배워서 생긴 한에 대한 한풀이는 우리 삼남매 대학 공부시킨 것으로도 모자라, 아직까지 동사무소 영어회화반에 다니는 것으로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였을까? 엄마는 그 당시 흔하지 않았던 4대문 안 대학생이었던 아빠한테 한눈에 반하고 만다. 그레고리 펙 닮은 호남형 얼굴의 아빠는 그 당시 법대 3학년 휴학중이었다. 법대에 다니고 있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게 없었다. 집안은 기울어져 가고 있었고 위로는 기 센 시누이가 4명이나 있었다. 결정적으로 별난 부모님의 생계를 짊어지고 나가야 하는 외아들이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그런 아빠가 너무도 좋았단다. 단지 무식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엄만 알았을까? 그때부터 엄마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그저 사람만 좋고 똑똑하기만 했던 아빠와 어떻게 저런 부모 밑에서 우리 아빠 같은 자식이 나왔을까?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며 고개를 절로 젓게 만드는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결혼 생활. 거기다 가끔씩 와서 부채질 하고 가던 얄미운 시누이들... 그래도 언니, 오빠, 그리고 내가 태어날 때까지 엄마는 그때가 엄마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말한다.

연탄사업을 했던 아빠의 사업이 잘되어서 나를 업고 매일같이 은행에 저축하러 다니던 그때가 제일 행복했었다고. 아무리 호된 시집살이도 그땐 참을 수 있었다고. 그렇게 매일 잘 될 것만 같았던 아빠의 사업은 운수업으로 갈아타기 시작하면서 기울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제대로 된 운전학원도 없었던 시절이라 기사들이 툭하면 사고를 치는 바람에 사람 좋은 아빠는 보험도 없던 그때 보험금마냥 사고처리를 했다고 한다.

엄마는 "오죽하면 피해자 가족이 더 미안하다며, 최근까지도 연락을 해왔다며 그때 그만큼 보상만 안 해줬더라도..."하며 4년 전에 돌아가신 아빠의 사진을 째려본다. 그래도 사람으로서 그럴 수 없었다는 아빠와 "식구들은 길거리에 나앉아도?"하는 엄마... 누가 맞았던 걸까? 차이가 분명한, 결코 만날 수 없는 하늘과 땅처럼, 아빠와 엄마의 삶은 그때부터 다른 길을 걸었다. 그에따라, 우리 삼남매 성격도 다르게 성장한 듯싶다. 지금까지 아빠처럼 '사람만 좋아' 고생하는 언니와 엄마처럼 뭐든지 '악착같아' 나름 성공한 오빠와 머리는 아빠처럼, 그러나 행동은 엄마처럼 하는 이중적 성격의 나. 그래서인지 같은 기억을 두고도 추억은 서로 다 다르다.

삶의 무게가 점점 더 무거워 질수록 점점 더 무능해져만 가는 아빠와 이렇게 살다간 우리가족 모두 굶어죽겠다고 분연히 떨쳐 일어나 사회로 나간 엄마. 중풍으로 13년 누워 똥오줌 다 받아내게 하던 시아버지만으로도 충분히 고단했을 엄마는 보험회사 판매원으로 하루아침에 취업여성이 되었다. 지금은 워킹맘이라는 멋진 말도 있건만, 왜 그때는 엄마의 직업란에 보험판매원이라는 글자를 쓰는 게 마치 '우리 집 가난해요'라고 공표하는 것 인마냥 그리도 창피했던 것일까?

한 달 뒤, 조그만 동전 주머니를 받아온 엄마는 "이게 뭔 줄 알아?, 이게 바로 토큰이야"하며 노랗고 조그만 토큰 30개를 내 보였다. 열심히 출근해서 받은 상이라고 이제 한 달 동안은 버스비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엄마의 안도에 찬 말에 나는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기뻤던 기억이 난다. 그 토큰이 더 많이 돌아다녀서 더 많이 보험을 팔아야 한다는 회사의 압박이었다는 것도, 그래야만 다음 달에도 또 토큰을 받을 수 있고, 그래야 우리 가족이 살 수 있다는 굴레 같은 것이었다는 것도 훨씬 나중이 되어서야 알았다.

보험에 대한 인식이 마치 '생사람, 빨리 죽으라고 고사지내라'라는 말로 잘못 와전되어 엄마는 모진 소리도 참 많이 들었다 한다. 남편 몰래 들었다고 남편이 원금그대로 해약 안 해주면 가만 안두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때도 많았고, 지금처럼 자동이체 시스템이 아닌 일일이 돈을 수금해야만 했는데, 그걸 노린 소매치기들이 너무도 많아 늘 조마조마했다는 이야기를 무슨 전쟁영웅의 승리담처럼 얘기를 하곤 하는 엄마의 모습 속에서, 난 나도 모르는 내 성격 속 '절대 긍정, 무한 낙천' 엄마의 유전인자를 발견하곤 한다.

쇠고기는 명절 때만 구경하는 건 줄 알던 그 시절, 가난한 지하방에 모처럼 쇠고기 굽는 냄새가 솔솔 나던 날이 아직도 기억난다. 간만에 먹은 쇠고기의 맛도 일품이었지만, 엄마가 그렇게 환하게 웃던 몇 안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성북동 재벌가들이 즐비한 곳에 위치했던 오빠의 고등학교에 가서 대학원서를 쓰고 오던 날, 엄마는 "내가 태어나서 이처럼 기분 좋은 날이 또 있었나 싶다. 내가 바로 그 류현규 엄마예요"라는 그 말 한 마디로 재벌가 사모님들의 높디 높은 콧대를 콱 꺾어줬단다. 그 사모님들이 다들 부러워 어쩔 줄 몰랐단다. "현규 정도면 서울대학교 문제없습니다"라는 말에 본인이 대학못갔던 설움이 한방에 사라졌다는 엄마. 시아버지의 똥오줌도, 아빠의 무능함까지도 모두 다 사라지더라는 기적을 맛봤다며 환희에 들떠 쇠고기를 굽던 엄마의 표정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때 그 맛나던 소고기는 정작 엄마 입에는 몇 점이나 들어갔을까?

"선형아, 좀 천천히 가." 오랜만에 만난 이번 여름의 엄마는 갑자기 폭삭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4년 전 그렇게 속을 썩여, '평생 원수!'라는 말을 달고 살게 했던 아빠가 어느 날 갑자기 암진단을 받고 얼마 못 살 거 같다는 의사의 말 그대로 얼마 못살고 돌아가셨다.

솔직히 아빠가 먼저 돌아가셔도 엄마는 끄떡 없을 줄 알았다. 평생을 아빠의 도움 없이 우리집 의 실질적 가장이었던 여장부 엄마이기에 아빠 없어도 씩씩하게, 아니 오히려 더 잘 살 줄 알았다.

"엄마, 우울증 초기란다." 울먹이며 소식을 전하던 오빠. 그때까지도 몰랐다. 아니 외면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지. 엄마의 노쇠해져가는 모습을...

'왜 이렇게 못 걸어? 구 여사. 왕년에 펄펄 날던 그 구 여사 어디갔어?' 하며 엄마를 놀렸지만, 허리가 아프다며 매일같이 가는 성당 가는 길도 몇 번을 쉬다 가자는 엄마를 보니 평생을 가냘픈 여자의 몸으로 짊어졌을 삶의 무게가 오롯이 느껴진다.

새벽에 도시락 다섯 개를 싸고, 아침 먹을 쌀이 있다는 것만으로 하루가 행복했다는, 늘 못 배운 게 한이 되어 내 자식만큼은 어떻게든 대학공부를 시켜야지. 하는 그 일념 하나로 주위의 모든 나쁜 시선들을 다 떨쳐버릴 수 있었다는 엄마.

사람 좋았던 아빠 덕에 우리 삼남매가 이렇게 잘 큰 거라며, 정작 고생은 혼자 다해놓고도 모든 공은 아빠에게 돌리는 엄마.

아직도 '프렌드'를 '후렌드'라고 말하면서도 이 나이에 영어 읽을 줄 아는 엄마가 어디 흔한 줄 아냐며 오히려 더 뻔뻔하게 '뭐 잘못됐어?'하는 엄마.

젊어서 중풍 걸린 시아버지 목욕시키다 삐끗했던 허리가 지금껏 괴롭혀 고질병이 되었다며 아직도 할아버지 욕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래도 그 할아버지의 아들인 아빠는 달랐다며, 아빠에 대한 맘이 여전함을 표현하는 엄마.

"그렇게 체력이 안 좋아서 어디 여행이나 가겠어? 집에서 놀지 말고 열심히 운동하고 있어. 그러면 막내딸이 언제고 꼭 엄마 데리고 여행갈게."
"응, 알았어. 엄마 지금처럼 열심히 살고 있을 테니, 너도 중국가서 열심히 살고 있어라"하며 또 체력 기르기 운동계획을 짜고 있는 엄마.

자식이 보기에도 창피할 정도로 억척이었던 엄마의 모습이, 본인은 얼마나 더 싫었을까? 자연스레 그 맘이 이해가 되어진 건 내가 한 아이의 엄마노릇을 15년이나 한 요즈음이다.

말도 안 통하고 그저 덥고 지저분하고 모든 게 한국과 다른 이 중국땅에 와서, 얼마 못살고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은 이 땅에서 하루라도 빨리 적응하려고, 한국에서 보다 더 잘 살려고 나도 모르게 억척을 떨며 살았던 것도 내 핏속에 엄마의 유전인자가 작용한 듯하다. 이젠 남편과 아들의 지적이 아니더라고 굳이 부인하지 않으려 하는 건 엄마의 '후렌드'하는 영어발음이, 하루하루 더 꼬부라져가고 휘어져 가는 엄마의 허리가 자식에게 고생을 대물림 할 수 없다며 이 악물고 살다가 그렇게 된 거라는 걸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원하던 삼남매의 대학 졸업도, 결혼도 모두 다 이루고 이젠 더 바랄게 없다는 엄마. 세상 좋아져 단돈 만 원에 노래며 컴퓨터, 영어 모두 배울 수 있다며 좋아하는 일흔이 다되어가는 엄마의 모습 속에서 풋풋했던 십대의 여고생 적 엄마 모습이 그려진다.

아빠의 유품을 정리하다 "'아지랑이 한들한들, 피어오르는 이 초봄에 미스타 류 생각에..."라고 시작되는 엄마가 아빠에게 보낸 연애편지를 서랍 속에서 우연히 발견했을 때, '아, 우리 엄마도 처음부터 그렇게 억척스럽고 드센 여자가 아니었구나, 엄마에게도 이렇게 여성스럽고 야리야리한 꽃분홍 진달래 같았었던 시절이 있었구나'하며, 웬만한 남자보다도 더 굵게 변해 버린 엄마의 손마디를 그렇게 만든 건 고단한 삶의 무게였다는 걸 굳이 말하지 않아도 너무나도 잘 안다. 엄마의 허리가 지금 그렇게 아픈 건, 엄마의 건강했던 척수를 쪽쪽 빨아먹고 자란 삼남매 때문이란 것도, 그 삼남매는 이제 쑥쑥 커서 자기 둥지를 틀고 지키기에만 바빠 어미새는 늘 뒷전이라는 것도, 그래서 엄마의 청춘도, 엄마의 건강도 모두 다  빨린 엄마는 허울만 남아서 갖은 마디마디 안 쑤시는 데가 없는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다는 것도 너무나도 잘 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미사에 가서 자식들의 안위를 비는 것밖에는 이제는 더 해줄 것이 없다며 오히려 아직도 더 많이 아쉬워하는 엄마.

'엄마 건강하게 잘 있어.. 다음에 같이 꼭 여행가자. 알았지? 꼭!!! 더 늦기 전에,'
'다음에 와선 아빠랑 쏘주 한 잔 하자. 아빠 좋아하는 아구찜이랑.'

새끼손가락 까지 걸며 약속했지만, 그 약속 지킬 수도 없게 서둘러 떠나버렸던 아빠처럼, 엄마와의 약속도 너무 늦게 지켜질까... 오늘도 조바심을 내본다. 엄마의 허리와 무릎이 더 꼬부라지기 전에 이 약속이 꼭 지켜지길 오늘도 내 맘과 다시 한 번 다짐해본다.

외할머니랑 너무 똑같다는 아들의 놀림에 '야! 그럼 딸이 엄말 닮지, 누굴 닮냐?' 당당하게 큰소리를 친다. '나, 엄마 안 닮았다고...'하며 악쓰며 울던 철없던 막내딸이, 이제는 '뭐 잘못된 거 있냐?' 평생 이 한마디의 신념으로 평생을 살아온 우리 엄마, 구 여사랑 똑같이, 아니 더 뻔뻔하고 억척스럽게  '맞어, 엄마... 뭐, 잘못된 거 있냐고!'하며 오늘도 자신만만하게 배포 있게 잘 살아갈 거야. 그러니까 엄마도 다시 만날 그날까지 홧팅!
#가족이야기-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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