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사에서 낸 고교 <한국사>교과서.
윤근혁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애초 심사본 304쪽에는 "소련의 지령을 받은 공산당"이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심의위는 이 내용에 대해서 '검정 심사 본심사 적합 판정본 수정·보완 대조표(수정본용)'을 통해 삭제할 것을 권고한다. 다른 쪽에 있는 이와 동일한 취지의 내용들에 대해서도 심의위는 '내용 재검토 요망', '표기 삭제' 등으로 보완·수정을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들은 이들 모두에 대하여 "조선 공산당의 찬탁이 소련의 지령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은 학계 거의 모든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임. 증언도 있음(박헌영 전집)"으로 미반명 사유를 명시하였다. 심의위의 수정 권고를 수용하지 않는 '고집'을 부린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고집'은 수정본 심사 과정에서 꺾인다. 최종 견본용으로 제출한 교과서에서 결국 '소련의 지령을 받은'이라는 문구를 슬그머니 삭제했기 때문이다. 심의위가 '검정 심사 수정본 수정·보완 대조표(견본용)'을 통해 신탁통치와 관련된 역사학계의 주류적 견해("모스크바 3상 회의 내용 중 임시정부 수립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총체적 지지의 입장을 밝혔다는 것")를 고려하여 내용을 재검토하라는 권고사항을 전달한 후였다.
심의위 수정·권고 아예 무시한 경우 적지 않아박정희의 5·16 쿠데타와 관련한 사례도 있다. 저자들은 애초 심사본 328쪽에 박정희 5·16 선언에 대한 장준하 선생의 평가를 실어 놓았다. 검정 심의 위원들은 이에 대해 삭제 권고를 한다. 하지만 저자들은 "5·16 직후 발표된 글로 당대의 지식인 사회가 5·16을 어떻게 보았는가의 문제임"이라고 미반영 사유를 밝히며 삭제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수정본을 대상으로 한 심사에서 심의위가 "장준하의 일생을 통한 정치적 입장에 비추어볼 때 예외적인 사례이고, 장준하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왜곡시킬 우려가 크므로 삭제할 것을 요망함"이라고 권고하자, 그제야 장준하 관련 내용을 삭제한다.
저자들이 심의위의 수정·권고를 아예 무시한(미반영한) 경우도 적지 않다. 물론 교과서 저자들이 심의위의 권고를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미반영 사유가 명백하고 합리적이면 얼마든지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심의위의 권고를 따르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심의위는 교과서 심사 통과 및 최종 합격 판정권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현실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조직이라는 말이다.
이 때문에 교과서 저자들이 심의위의 수정·보완 권고를 따르지 않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상황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저자들이 마지 못해 심의위 권고를 따른 것처럼 보이는 위의 사례들과 더불어 이들이 갖고 있었을 보이지 않는 모종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게 한다.
구체적인 예를 보자. 저자들은 심사본 301쪽에 "냉전에서 경제는 체제의 우월성을 가르는 지표가 되었다"고 썼다가 심의위로부터 '내용 재검토 요망' 판정을 받는다. 하지만 이 권고는 수정본에 반영되지 않았다. 저자들은 그 사유를 "다른 요소도 있지만 전쟁이 아닌 경제력을 통하여 우위를 확보하려 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혀 놓았다.
심의위는 심사본 311쪽 18~20행의 "김일성은 ~ 보았다"에 대해 '서술 내용 재검토' 권고를 내린다. 하지만 저자들은 "폭동, 파업, 게릴라 활동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일관된 대남 전략이었음. 서술을 바꿀 정도의 증거는 없다고 봄"이라고 미반영 사유를 밝히면서 심의위의 권고를 수용하지 않는다.
저자들의 '보이지 않는 의도'는 특정 내용을 '꼼수' 편집함으로써 심의위의 애초 권고를 무력화하는 방식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다. 수정본 327쪽에는 정통성 위기에 시달리는 전두환 정부에 대한 소련과 북한의 총공세를 설명하는 대목이 있었다. 저자들이 그 '총공세'의 사례로 든 사건은 북한 여간첩 김현희가 연루된, 1984년의 대한항공 칼기 폭파 사건이었다.
심의위가 이 문제를 실수로 누락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수정본 심사 과정에서 이 대목에 대한 수정·보완 권고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다가 심의위는 견본 심사 과정에서 칼기 폭파 사건 사례가 소제목과 관련이 없으므로 '내용 삭제' 권고를 내린다. 그제야 저자들은 이러한 권고를 받아들여 수정·보완 결과에 '내용 삭제'라고 표시한다.
그런데 그 내용이 완전히 삭제된 것은 아니었다. 심의위 판정이 아닌 '자체 수정에 의한 수정사항' 목록표를 보면, 문제의 내용을 344쪽으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저자들이 내세운 '정정사유(자율기재)'는, "수정본 327쪽의 내용을 소제목에 맞는 344쪽으로 이동"으로 되어 있다. 저자들이 소제목에 맞춘다는 사유를 내세우면서 문제의 내용을 17쪽이나 건너뛴 곳으로 옮겨와 살려 놓은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강제징용'을 '징용'이라 쓴 저자들, 비판 받아 마땅이밖에도 교학사 교과서는 내용 실수나 오류가 다른 교과서에 비해 많다. 최초 심사본 결과 나타난 오류는 '내용' 부문에서만 479건이나 된다. 다른 교과서들의 207~302건과 견줄 때 최대 2배까지 많은 양이다. '표기·표현' 부문의 오류도 248건에 달한다. 표기·표현의 오류야 단순 실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치자. 하지만 내용상의 오류 사례를 보면, 단순히 저자들의 실수나 불성실함에서 비롯된 것으로만 보기 힘든 것들이 많다.
그들은 왜 일제 시대 지도에 '동해'를 표기하지 않았을까. 그들은 왜 구한말과 일제 시대의 지도에서 서울을 각각 '한성'과 '서울'로 표기했을까. 혹시 '한양'과 '한성', '경성'과 '서울'을 구분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그들은 최초 심사본에서 일제 시대 자본가였던 김성수를 '민족주의자'라는 말로 수식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성수는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대표적인 친일파다. 미군정 체제의 모순 속에서 일어난 대구 10·1 사건과 그 시민들을 '대구 폭동', '폭도들'로 서술한 예도 있다. 이 모두가 함량 미달의 교과서 수준과 의심스러운 정치적 의도 등이 복합적으로 다가오는 사례들이다.
원칙적으로 역사 교과서는 검정 심사의 준거가 되는 교육과정이나 편찬상의 유의점, 집필 기준 등에 따라 '중립적으로' 서술되어야 한다. 그런데 역사 서술에 완전한 중립이 있을 수 있을까. 이들 준거에 담긴 구체적인 내용들이 본질적으로는 특정한 의도를 품고 있는 역사관에 따라 세워진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저자들의 '보이지 않는' 의도 자체를 문제삼을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의도가 터 잡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나 이에 대한 역사적 서술 내용 등은 진실에 입각해야 한다.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인식이나 건강한 시민 대중의 역사 상식에도 부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가령 '강제 징용'을 '징용'으로 표기한 저자들의 의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친일파 김성수를 '민족주의자'로 생각하는 저자들의 '보이지 않는' 의도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순수하게(?) 봐주기 힘들다.
교학사 교과서는 그런 '보이지 않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다른 수많은 사례들도 담고 있다. 언론을 통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승만과 박정희를 미화하고, 이명박 정권을 긍정적으로 서술한 것과 달리,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서술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런 편향된 서술과 그 이면의 노골적인 의도를 숨긴 역사 교과서가, 아이들이 건강하고 합리적인 역사의식을 형성하는데 큰 해악을 미칠 것임은 분명하다. 현장 교사들의 현명한 판단과 결정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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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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