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전우의 죽음 앞에 그의 총에다 철모를 씌우고는 추도의 기도를 드리는 유엔군들(1952. 5. 30.).
NARA, 눈빛출판사
마지막 약속나는 편지를 다 읽은 뒤 기내 창 커버를 내리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깜깜한 밤하늘에는 별들이 영롱했다. 그 별들 사이에 문득 할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나는 아홉 살 소년이었다. 그때 우리 악동들은 미군부대 철조망 부근을 어정거리거나 경부선 철길에서 미군열차가 지날 때 손을 흔들면 코쟁이들이 던져준 씨레이션 깡통을 줍기도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장손인 나에게 그런 곳은 얼씬도 못하게 했다. 날마다 당신이 거처하는 사랑방에 꿇어 앉히고 동몽선습과 명심보감을 펴고는 대나무 회초리로 종아리를 치시며 '공자 왈 맹자 왈'을 강독하셨다.
"군자는 식무구포(食無求飽)요, 거무구안(居無求安)이라""군자는 먹는데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사는데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나는 할아버지가 강독한 대로 앵무새처럼 따라 외웠다. 그런 가운데 할아버지의 폭음은 날로달로 늘어갔다.
"지난 10·1사건과 육이오전쟁으로 같은 피를 나눈 젊은이들끼리 서로 죽이는 걸 보고 상심이 커서 그런 모양이데이."할머니가 폭음으로 쓰러지신 할아버지를 사랑으로 모신 뒤 나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어느 날이었다.
"상민아.""예.""니는 어려 잘 모를 거다마는 이번 전쟁은 김일성이와 이승만 때문에 일어났다. 어째든동(어쨌든), 둘이 손잡고 둘로 쪼개진 나라를 하나로 합칠 생각은 하지 않고, 서로 소련제 미국제 무기 마구 끌어다가 애꿎은 백성들 숱하게 죽였다.""……""너는 지금 일을 단디(야무지게) 봤다가 나중에 이 이야기를 꼭 글로 남겨라. 우리 고장은 예로부터 충절의 선비가 많이 나왔다."나는 문득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나에게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내가 다시 밤하늘을 응시하자 할아버지의 얼굴은 사라지고 동녘 하늘 한편에서는 부옇게 새배빛이 밝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