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혜선 쌤이랑 유정이와 함께 베락마진소로 가는 참인데 엄마가 쌤에게 전화하셨다. 막 달려서 밭길을 질러 집에 왔는데도 오래 걸렸다. 아빠는 벌써 병원으로 가셨고 엄마와 국이 삼촌, 상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국이 삼촌 차에 탔다. 엄마는 조수석에, 나와 동생은 뒷좌석에 앉았다.
"평화로로 가지 맙서. 산으로 갑서게."국이 삼촌에게 그 말을 한 후로 엄마는 입을 꾹 다물고 계셨다. 평화로는 애월 지나가는 길이다. 엄마가 우시나? 슬쩍 보았는데 엄마는 울지 않으셨다. 한참 가니까 마음이 불안했다. 엄마는 지금 하영 슬퍼서 숨도 쉬기 어려운 게 아닐까. 엄마에게 뭐라고든 말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엄마, 병원에 가면 선아 누나도 왔겠네요?""병원 안 가고 장례식장 간다. 누나는 저녁에나 오겠지. 서울에서 오는데."엄마 대신 국이 삼촌이 대답했다. 선아 누나는 외삼촌 딸이다. 서울에서 대학교에 다닌다. 누나는 우리 엄마를 무척 좋아한다. 엄마는 중학생 때부터 외삼촌댁에서 살다가 결혼을 하셨다. 그러니까 엄마와 누나는 친할 수밖에 없다.
누나 생각 사이로 엄마 옆모습을 보았다. 엄마는 풀죽은 조베기처럼 보였다. 풀어져서 힘이 하나도 없는 조베기. 조베기가 뭐냐면, 표준말로 하면 수제비다. 제주 섬을 맨 처음 만든 분은 설문대할망이다. 설문대할망이 제주섬을 만든 다음에 조베기를 뚝뚝 바다에 떼어 던지자 그게 모두 작은 섬이나 여로 변했다. 범섬, 문섬, 섶섬, 검은여가 다 그렇게 생겨났다.
이제는 공사장이 된 중덕 바위. 서귀포 바다의 조베기 섬들이 한눈에 보이는 바위. 그중 젤 높은 바위에 서서 "아빠~ 아빠~ 아빠~" 하고 부르면, 코지에서 낚음질하는 아빠는 뒤도 안 돌아보고 그냥 손만 번쩍 들어 흔들어주셨다. 나는 아빠 등을 향해 두 손을 흔들었다. 바다와 나 사이에 아빠가 계셨다.
바위와 바다는 가로막혔고 외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이제 외가에는 누가 살게 될까? 상아가 태어났을 때, 나는 엄마 따라 외가에 잠깐 산 적이 있다. 아침이면 할머니가 '해맞이어린이집'까지 데려다 주셨다. 지붕이 알록달록 색칠된 어린이집이었다.
어린이집에는 아주 작은 강아지 다섯 마리가 있었다. 강아지들은 문 밖 밭담 아래서 장난치며 놀곤 했다. 내가 할머니 손을 놓고 강아지들에게 달려가면 할머니는 "강생이가 여섯 마리구나" 하고 웃으셨다. 숲을 보고 가는데도 할머니 생각을 하니 마음이 답답했다. 할머니를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는.
산록도로는 경사가 심하고 구불구불하다. 오르막길에서 국이 삼촌은 선글라스를 꺼내 꼈다. 햇빛이 차창 가득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상아는 잠이 들었다. 엄마는 어디쯤 오는지 묻는 아빠와 통화하신 후로도 여전히 말이 없으셨다. 나는 손을 유리창에 대고 밖을 내다보았다.
숲이 계속 이어지며 우리를 지켜본다. 나는 6월에 여기 왔을 때가 좋았다. 그날은 조금 흐렸는데 산딸나무 하얀 꽃이 엄청나게 피어 있었다. 지금은 가을이라 꽃이 다 졌다. 나무들 다리가 촘촘히 서 있는 숲 안쪽은 캄캄하다. 고개를 들면 나뭇잎들이 여러 가지 초록색으로 환하게 빛난다. 어른이 되면 이 길을 걸어서 올라가보고 싶다. 그때가 6월이라면 산딸나무 꽃이 필 테고, 나는 흰 지붕 아래를 걷는 기분일 것이다.
"가마귀 모른 식게가 뭐꽈?""니가 진숙이 아들이냐? 눈이 순한 게 어멍 닮안. 공부 열심히 해라."장례식장에서 만난 친척 어른들은 나에게 거의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빈소라고 하는 방에는 외할머니 사진이 흰 국화에 둘러싸여 있었다. 외삼촌 두 분과 아빠, 이모와 친척 어른들이 와 계셨다.
엄마와 외숙모는 할머니가 손수 만들어 두셨다는 삼베 수의를 꺼내 살펴보셨다. 성당에서 오실 분들이 내일 할머니에게 입혀드린다고 했다. 나는 아빠 옆에 앉아서 어른들이 장례절차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옛날 같으면 장례 첫날은 마당에서 관을 만드는 날이라고 하셨다. 내일이 일포인데 아침에 염과 입관을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아빠에게 조용조용 물었다.
"염이 뭐에요?"할머니 몸을 씻어드리는 거야. 그 다음에 수의를 입혀드리지.""일포는요?""친척들 말고 다른 조문객들이 오시는 날이야.""친척 아닌 사람은 오늘 오면 안 되는 거예요?""시간이 안 맞으면 할 수 없지만, 보통은 일포에 오는 게 풍습이거든."저녁 먹기 전에 강정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큰 통에 팥죽을 담아 가져오셨다. 장례 첫날은 사돈집에서 팥죽을 쑤어오는 것이라고 하셨다. 팥죽을 드시는 분들이 신기해 하셨다.
"사돈집에서 팥죽 쑤어오는 풍속 다 없어진 줄 알았습니다. 오랜만이라 신기하네요."우리가 팥죽을 먹고 있을 때 선아 누나도 왔다. 빈소에서 밤을 세우기 위해 친척들이 몇 분 더 오셨다. 상아는 강정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집으로 가고 나는 누나 옆에 남았다.
어떤 할아버지가 오셔서 할머니 영정에 절을 하시며 "누님, 누님" 하고 큰소리로 우셨다. 외삼촌이 빈소 옆 작은 방으로 모시고 들어가셨다. 외할머니에게 동생이 있었구나. 나는 외할머니에게 동생이나 오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밤늦게 우리는 외삼촌댁으로 왔다. 나는 빈소 옆에서 자다가 잠결에 차를 타고 왔다. 엄마와 누나는 차 안에서 계속 할머니 이야기를 했다.
"선아야, 할망 불쌍한 분이다. 살암시니(살아지니) 살았지… 그 고생을 하고."엄마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죄도 어시 평생 눈치 보고 산 우리 어멍… 가마귀 모른 식게를 평생 지낸 분이다." "그 식게(제사) 나도 보긴 했수다. 고모, 그게 누구 식게꽈?""나중에,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나는 속으로 막 궁금했다. 택시를 내려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누나에게 물었다.
"누나, 가마귀 모른 식게가 뭐꽈? 왜 까마귀 모르게 식게를 지내꽈?""상규가 궁금해 속이 탔구나 하하. 남모르게 간소하게 차려놓았다가 치우는 식게야. 가족 없는 망자나 어린 아이 식게지.""할망은 4·3 때 고등여학교 학생이었대"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밤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내 마음이 갑자기 낯설고 넓은 길로 밀려나온 날이었다. 아픈 도장이 마음 속에 쾅쾅 찍힌 것 같기도 한 날이었다. 엄마와 누나가 거실에 앉아 하는 이야기를 다 들었기 때문이다.
"고모, 그거이 누구 식게꽈?""이웃 사람들. 어려서 죽은 할망 아들하고.""이웃 사람 식게를? 무슨 내용이꽈?""선아야, 할망 고향은 본래 표선인데, 4·3 나던 해에 열다섯 살 고등여학교 학생이었대. 나중에 여중학교가 된 곳이야. 시내 작은아방 집에서 하숙을 했댄. 셋오라방(둘째 오빠)은 목포로 상업학교에 갔고. 그런데 11월에 부모님하고 큰 오라방이 학살당했어.""아까 오신 동생은 어떻게…?""그분은 나이가 어려 살았지.""기꽈? 그분들이 좌익 사상 가졌수꽈?""사상하고 관계없다. 토벌대가 와서 가족 중에 빠진 사람 있으면 무조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해 총살했댄.""할망은 그 후로 어찌 살암수꽈?" "작은어멍이 식모로 부리다가 6·25 난 해에 육지에서 온 군인한테 시집보냈단다. 군인 가족이 되면 안전하니까. 그분과 아들 하나 낳고 삼 년을 살았는데 육지로 전근 간 후 소식이 끊겼단다.""찾아가보셨대요?""아니, 할망은 그 분이 무서웠대. 이웃 사람을 좌익으로 처형하는 것도 봤고…. 그 이웃사람 식게를 할망이 차렸어. 죄 씻음 하신다고.""그 후에 우리 하르방 만난 거?""하르방은 4·3 때 육지 형무소에 끌려갔다가 1년 만에 오셨다더라. 와보니까 모친과 세 아이만 남고 가족이 다 돌아가셨더래. 전쟁 후에 할망이 전실 아이 셋 거두며 애월 집에 들어갔지.""그때 할망이 몇 살이었는데?""스물세 살.""우리 할망 불쌍하다. 그렇게 아이도 많은 집에 뭐 하러 갔나.""친정동생 데려와도 된다 해서 두말 않고 갔다더라. 결국 동생은 중학교 못 마치고 친척이 있는 위미로 갔지. 식구는 많고 매형은 하영 술만 먹으니까. 할망은 동생 돌보지 못한 게 평생 한이었다. 너희 아버지 고등학교 다닐 때도 위미 삼촌네는 교복 입고 가지 말라 했어.""고모, 왜 여태 나한테 그런 말 안 했수꽈?""좋지 않은 일이니까. 다들 잊으려고만 했지.""고모, 나는 지금까지 우리 집은 4·3 피해 가족 아닌 줄 알았어."선아 누나가 울었다. 할머니께 잘 해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했다. 누나 방 침대에 누워 귀를 기울이던 나도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먹먹했다. 콧물을 훌쩍이지 않으려고 가만히 닦았다. 하지만 그 다음에 들은 엄마 이야기는 더 놀라웠다. 나는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날 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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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한국작가회의.
2000 한국일보로 등단. 시집 <이발소그림처럼> 공동저서 <그대, 강정>.장편동화 <너랑 나랑 평화랑>. 2011 거창평화인권문학상
** 월간 작은책에 이동슈의 삼삼한 삶 연재. 정신장애인 당사자 인터넷신문 '마인드포스트'에 만평 연재중. 레알로망캐리커처(찐멋인물풍자화),현장크로키. 캐릭터,만화만평,만화교육 중.
*문화노동경제에 관심. 현장속 살아있는 창작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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