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블랙리스트 때문에 결국 취업 안 됐죠"

파업 반대 택배기사를 파업 주동자로...진짜 이유는 '재계약 거절'

등록 2013.09.12 09:39수정 2013.09.12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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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2일 아침 서울시 양천우체국. 차량에서 우편물들이 내려지고 있다.

12일 아침 서울시 양천우체국. 차량에서 우편물들이 내려지고 있다. ⓒ 김동환


"저는 직접 불이익을 당해보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다른 위탁 택배기사들은 많이 알고 있던 모양이더라고요. 저랑 같이 7명이 그만뒀는데 그중 4명은 서울의 다른 지역 우체국에 (취업) 시도를 했어요. 그런데 우정사업본부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다고 결국 취업이 안 됐죠."

지난 9일 저녁. 서울 금천구의 한 다방에서 만난 우정사업본부 택배기사 블랙리스트 피해자 정동조(가명)씨는 시종일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기사 동료들이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에 대해 "(우체국에) 질렸다"면서 "이유가 정말 궁금하지만 우체국과 더 이상은 엮이고 싶지 않고 다시 일하고픈 생각도 없다"고 손사레를 쳤다.

우정사업본부는 지난 6월 28일 정씨 등 5명의 위탁택배 기사들의 실명과 차량번호를 적시한 문건을 경기·인천지역 우체국의 위탁기사 담당부서로 발송했다(관련기사 : 택배기사 울리는 우체국의 '교묘한 갑질'). 해당 기사들이 2011년 서울 금천우체국에서 파업을 주동했던 사람들이니 다른 우체국에 채용되지 않도록 주지시키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취재 결과 이들이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진짜 이유는 '재계약 거부'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법적으로 개인사업자에 해당하는 위탁택배 기사가 계약이 정상적으로 만료된 후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하자 국가기관에서 사실과 다른 누명을 씌워 이들의 취업 활동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블랙리스트에 올려 3년 동안 일 못하게 할 거라 했다" 

a  우체국 택배기사들이 지역별로 택배 분류를 하고 있다.

우체국 택배기사들이 지역별로 택배 분류를 하고 있다. ⓒ 김동환


정씨는 이날 기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파업을 주동한 적이 없다"는 말부터 꺼냈다. 우정사업본부가 자신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것. 그는 자신이 2011년 금천우체국 파업 당시 오히려 파업 반대편에 서서 동료 기사들에게 비판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금천우체국이 구로구·금천구 물량을 담당하는 곳이라 일이 많아요. 그런데 파업이라니요. 전체 기사 40명 중 저처럼 파업을 반대하는 기사는 열 명 정도였는데 어느 날 위탁업체에서 불러요. 갔더니 '파업 찬성 기사들이 복귀 조건으로 저와 다른 기사 한 명을 해고해달라고 했다'면서 '다른 곳으로 가달라'고 하더군요." 


황당한 요구에 정씨는 반발했다. 그러나 안 갈 수는 없었다. 정씨는 "안 가면 블랙리스트에 올려서 3년 동안 일을 못 하게 할 거라고 했다"며 "업체에서는 위탁기사 수가 모자란 수원우체국 위탁업체를 2년만 도와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서울시 양천구 인근에 사는 정씨는 이런 사정으로 파업 종료와 함께 수원우체국까지 쫓겨갔다. 금천우체국에서 평소 친하게 지내던 택배기사 다섯 명도 쫓겨난 두 사람에 합류했다.


정씨는 수원우체국에서도 파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는 최근 우정사업본부가 일방적인 기준의 차등수수료제를 도입하면서 이에 반발한 수도권 택배기사들이 파업을 벌이자 위탁업체의 요구를 수용해 타 우체국까지 가서 빈 자리를 '땜빵'하기도 했다.

올해 6월로 업체와의 계약이 종료된 정씨는 새로 수원우체국 택배위탁을 맡은 A업체와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다시 서울에 있는 우체국으로 옮기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안 될 것'이라는 주변의 귀띔을 들었다.

정씨는 "자신과 동료 4명이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게 그때였다"면서 "일해달라면 일해주고 싸워본 적도 없고 파업에 앞장선 적도 없는데 이런 대우를 받으니 심적으로 상당히 상처를 받았다"고 털어놨다.

결국 우체국 일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정씨와는 달리 블랙리스트에 오른 다른 동료들은 한 두 명씩 흩어져서 각각 다른 서울 소재 우체국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무의미한 일이었다. 정씨는 "모두 '안 되겠다'는 대답을 받아왔다"고 말했다.

위탁업체 "배달기사와 문제 생기면 우정본부에 보고할 수밖에" 

당초 우정사업본부는 이 건과 관련해 '정부는 택배 기사들의 채용과정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그러나 블랙리스트가 보도된 이후에는 책임을 위탁업체들에게 미뤘다.

우정사업본부의 한 관계자는 "해당 '리스트'에 대해서는 업체들의 요구가 있었다"며 "업체들이 네트워크가 안 되니까 우체국을 통해서 전달해달라고 했고 그래서 전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정본부는 업체들의 요구를 들어 '전달책'의 역할을 맡았을 뿐 개별 택배기사 임용에 대해 자신들이 직접적인 관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씨 등 블랙리스트에 오른 5명이 몸담았던 A위탁업체의 설명은 달랐다. A업체 관계자는 "수원우체국 위탁기사 26명 중 7명이 한 번에 그만두면 배달 파행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우정사업본부에 하소연 한 적이 있다"면서 "우정사업본부에서는 우리 보고를 듣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려준 것"이라고 말했다.

정씨 등 7명이 수원우체국과 재계약을 맺지 않고 서울로 직장을 옮기려 하자 우정사업본부에서 합리적인 '관리'에 나섰다는 것이다. 향후에도 재계약 만료 후 일터를 옮기려는 택배 기사가 다수 발생할 경우 우정본부 차원의 블랙리스트가 운용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그는 "업체에서 요청을 했다기보다는 정상적인 보고절차를 밟았던 것"이라며 "위탁 배달원과 이런 일이 있으면 보고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다른 블랙리스트도 존재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우정사업본부에서 (업체를 위한) 선의를 가지고 일회성으로 보낸 것이지 블랙리스트는 없다"고 부인했다.

업체 관계자는 "정씨 등 5명은 금천우체국에서 수원우체국으로 넘어올 때부터 다른 기사들과는 달리 위탁수수료를 건당 50원 가량 더 받아왔고 이번에도 이면계약을 요구했다가 결렬되자 재계약을 포기한 것"이라면서 억울함을 주장했다. 그는 "블랙리스트 운용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재취업 막혀 억울... 이젠 그곳에서 일할 생각 없어"

a  한 우체국 택배 차량이 도로위에 세워져 있다. 우체국 위탁택배 기사들은 도색, 유류비 등 차량 관련 유지비를 전액 본인이 부담한다.

한 우체국 택배 차량이 도로위에 세워져 있다. 우체국 위탁택배 기사들은 도색, 유류비 등 차량 관련 유지비를 전액 본인이 부담한다. ⓒ 김시연


우정사업본부는 블랙리스트에 정씨 등 5명의 명단을 올리며 '파업주동자'라는 거짓 딱지를 붙였다.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장까지 옮겨야 했던 정씨 입장에서는 황당한 일이었다. 우정본부에 5명의 명단을 보고했다던 A업체 관계자도 이들이 파업을 주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날 정씨는 '우체국이 조직적으로 재취업을 막은 셈인데 억울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렇게 일해온 내게 파업 주동자라니 어이가 없지만, 어차피 이제는 우체국에서 일할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1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택배 기사들의 현실에 염증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는 "7월과 8월을 별다른 수입 없이 보냈고 아직 놀고 있지만 생계의 위협은 (택배기사로) 벌 때도 항상 느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전 6시에 출근해서 평균 15시간 일해요. 월요일·일요일 빼고. 이 일 하려면 자기가 차를 사서 들어와야 하고 유지비도 부담해요. 회사에서 번호판도 돈 내고 빌려씁니다. 저희가 네 식구인데 순수익으로 따지면 270만 원 정도 가져가지요. 못 버는 사람은 저보다 100만 원 정도 적게 가져가고요." 

정씨의 우체국 택배 경력은 6년. 그는 노동대비 적은 임금보다 우정사업본부에서 위탁업체, 위탁업체에서 택배기사로 이어지는 착취의 구조가 더 싫었다고 고백했다. 결국 먹이사슬의 최하단에 있는 택배기사들만 죽어난다는 이야기다.

정씨는 우정사업본부가 택배 단가는 10년 째 거의 같은 수준으로 못박아두면서 택배기사들에게는 양질의 서비스를 강요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체국 택배는 지난해 한국생산성본부가 선정한 택배서비스 부문 고객만족도(NCSI)조사에서 6년 연속 1등을 차지했다.

"우체국에서 우리한테 유니폼을 1년에 두 번 줘요. 그러면서 유니폼에 우체국이라고 적혀 있으니 민원인에게 그에 맞는 친절한 서비스와 봉사를 하라고 하거든요. 자기들이 불리할 땐 위탁기사들이라고 업체랑 얘기하라고 하면서 서비스 얘기할 때는 공무원 수준에 준하는 행동을 하라고 해요." 

정씨는 "(우체국의 태도는) 시내버스에 타서 '우리 집 앞까지 가달라'고 하는 꼴"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좋은 서비스 같은 건 일하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현실에 맞는 대우를 해 주면 자연스럽게 나오게 돼 있는 것 아니냐"며 자리를 떠났다.
#우정사업본부 #우체국 #우체국택배 #블랙리스트 #위탁 택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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