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4일 강원도 철원군 육군 제3사단 신병교육대에서 열린 신병수료식에서 훈련병들이 백골구호를 제창하고 있다.(자료사진)
연합뉴스
그때 문득 내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이 있었다. 갑자기 목이 뻣뻣하게 굳어오는 것을 느꼈다. 막내가 입은 와이셔츠는 내가 큰동생에게 사준 바로 그 갈색의 줄무니 와이셔츠였던 것이다. 부모가 함께 있지 않아도, 누이가 곁에 없어도 저희들끼리 서로를 다독이고 위해주는 그들의 나눔에는 내 것 네 것이 따로 없었다. 늘상 그들은 나에게 동생이라기보다 자식과 같은 심정으로 자리하고 있었기에 그들의 대견한 성장 앞에 목이 메어왔다.
부모의 이혼에 심리적 타격이 가장 컸던 막내는 카세트에 팝송 테이프을 감아내리며 자신을 추스려왔다. 그런 막내가 의젓이 입대를 하는데 왜 아버지는 막내를 위해서라도 어머니에게 다정한 눈길 한번 못 주는 걸까? 그 나이에 가지기 쉬운 자존심인가? 아니면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을 거꾸로 드러내 보이는 걸까?
막내를 떠나 보내기 위해 잠시나마 만난 가족들. 그러나 기쁨처럼 번져오는 유열도, 자식을 보내는 이별의 아픔도 쉽게 드러내놓지 못했다. 웬만한 가정이라면 입대하는 아들의 손목을 잡고 섧은 눈물을 쏟았겠지만, 십여년 만에 만난 네 사람은 또 다른 이별을 앞에 두고 소리없이 울음을 삼켜야 했다. 우리들의 슬픔은 눈물로도 씻어내지 못할 더 큰 샘을 지니고 있었나보다. 서로의 뇌리에 다시는 지울 수 없는 문신처럼 저마다의 가슴에 새겨져있는지도 모른다.
막내만 결혼해서 잘 사는 걸 보면 여한이 없다고 되뇌던 어머니, 그 어머니의 눈꺼풀이 이제는 무겁게 내리 덮히고 팔목에 반점이 나날이 검은 꽃을 피우는데. 어렵게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그리 길지 않은데.
세월이 흘러 막내의 결혼식 날, 예비신부인 올케에게 결고운 순백의 와이셔츠를 사서 건네주었다. 그날만은 티끌만 한 얼룩 하나 허용하고 싶지 않았다. 동생이 어두운 터널을 지나오기까지의 아팠던 종양들과 시름의 흔적에서 그를 한시도 머물게 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두 분 부모님께서 그간 감추고 사셨을 인간적인 애련과 애증의 찌꺼기마저 정갈하게 표백하고 싶었다.
감청색 턱시도에 받쳐 입은 동생의 와이셔츠는 눈이 부셨다. 양복 저고리에 꽂힌 순백의 백합과 그 옆에 마음씨 고운 올케와도 잘 어울렸다. 빳빳하게 날이 선 와이셔츠 칼라에서 나는 동생의 환한 미래를 점쳤다. 그리고 그날 그가 입은 와이셔츠의 요요한 눈부심 속에 한없이 묻혔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한없는 나약함을 고작 흰 셔츠에 기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은 곧 부모님과 동생들로 인해 늘 걸리던 우울의 굴레에서 벗어나고픈 심정이었을 것이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결혼 반주곡을 생각하면 축제의 코러스처럼 내 귀에 울려퍼진다. 그날 이후 내 속에 흐름을 정지했던 시냇물 노래 다시 여울지고, 스러져가던 젊음의 빛깔을 다시 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늦은 밤 가끔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럴 때마다 그날 막내의 어깨 너머로 화혼을 밝히던 촛불이 바로 저기, 서편 하늘에 일등성별로 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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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동생의 줄무늬 셔츠... 저는 목이 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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