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8일 오전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 <고 명천 이문구 영결식>.2월28일 오전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 <고 명천 이문구 영결식>.
홍성식
'어제, 핍박받고, 고통받아온 자들의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 속에 대통령 취임식. 바로 그날 밤 10시 40분. 조선의 마지막 선비가 세상을 뜨셨다. 한국문학의 왕이 '崩御(붕어)'했다. 명천 이문구(향년 62세)의 타계는 내게 그렇게 다가온다…'
능수능란한 충청도 입말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장엄하고 우뚝한 문장의 산맥 하나를 온전히 홀로 만들어낸 사람. 한국어로 축조된 문학이 가닿을 수 있는 '스타일리시'의 한 절정을 보여준 작가.
이문구는 <매월당 김시습>과 산문집 <나는 남에게 누구인가>를 통해 금도(襟度)를 지키는 조선 선비의 길을 가감 없이 보여줬다. 또한, 그는 독재자 박정희가 지배하던 어둠과 공포의 유신시대, 두려움을 떨쳐내고 문학을 통해 고통 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작가단체'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발기인이었다. 선비와 투사가 결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온몸으로 증명한 기개.
작품집 <관촌수필> <우리동네>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는 가난하고, 소외받고, 핍박받는 사람들의 질박한 삶을 오직 이문구만이 구사할 수 있는 휘황한 문어체와 유장한 문장을 통해 빚어낸 한국문학의 깨질 수 없는 비석이다.
이에 반론을 제기할 작가와 평론가는 지난 시절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이문구 소설어 사전>의 저자 민충환은 '그의 문체는 한국의 평단 전체가 달라붙어 연구해도 모자랄 풍요로운 언어의 숲'이라고 했을까?
이문구가 사라진 지 10년 하고도 몇 개월. 고저와 장단이 입에 붙은 노래처럼 매끄럽던 그의 문체와 어떤 빼어난 편집자의 교정과 교열도 필요로 하지 않던 완벽에 가까운 문장이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난 그 시간동안 한국문학은 옹색하고 졸렬해졌다. 어떤 소설가도 그를 대신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이 추세는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듯해 안타까움은 더한다.
터무니없이 조잡한 내 글재주로 이문구의 문학에 대해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저, 동시대를 함께 살아낸 작가들에게 들었고, 직접 겪었던 '이문구에 관한' 이야기 두 개를 소개하는 것으로 아직도 그와 그의 소설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아쉬움과 슬픔에 동참하고자 한다.
[첫 번째 이야기] 김동리와의 인연
이문구의 가족사는 참혹한 한국현대사와 궤를 같이 한다. 이문구의 부친은 해방공간에서 좌익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맞는다. 그의 두 형 역시 같은 이유로 고향 인근 대천 바다에 수장됐다.
난리통에 아들과 손자 둘을 한꺼번에 잃은 상투머리 이문구의 조부는 눈을 감지도 못한 채 죽었다. 이문구의 역작 <장한몽>은 이데올로기가 야기한 전쟁 탓에 꿈을 펼쳐보지 못하고 타의에 의해 유년을 잃어버려야 했던 작가 자신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투사하고 있다.
이처럼 무참하게 상실된 유년과 부재한 아버지에 관한 그리움을 이문구는 대학 시절 스승이었던 소설가 김동리를 통해 일정부분 위로받는다. 김동리는 학기말 시험 문제로 '이문구의 소설에 관해 논하시오'라는 문제를 낼만큼 '상처 많은 스무 살 청년 이문구'를 아꼈다. 하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김동리는 유신을 두둔하던 대표적 우익작가 중 한 명. 불협화음은 이미 예견돼 있었다.
김동리와 이문구의 인연이 30년 가까이 지속되던 1980년대 후반. 한국문단은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자'는 작가들과 '예술적 순수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 주장하는 이들로 갈려 이른바 '순수-참여 논쟁'이 뜨거웠다.
그즈음 펜클럽대회가 개최된다. '현실 참여'를 주장하던 작가단체 민족문학작가회의에 의해 이문구의 스승이자 '문학적 아버지'인 김동리가 참혹하리만치 비판을 받는다.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이문구가 발기인이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이름을 바꾼 단체. 당연지사 이문구는 그 단체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이문구의 고민은 깊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정당성과 명분은 자신이 몸담은 조직이 가졌다하더라도, 그 단체가 '아버지'를 거부한다면…. 이문구는 결국 자신이 주도해 만든 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족문학작가회의)를 탈퇴한다. 김동리를 향한 세상의 손가락질에 자신은 동참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를 두고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해 세상의 큰 흐름을 거스른 것'이란 비판이 비등했다. 그러나, 이문구는 어떤 힐난에도 의연했다. 누군가는 '소아(小我)를 위해 대의(大義)를 버렸다'고 말했지만, 소아와 대의는 칼로 두부를 자르듯 쉽게 양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문구에게 있어 대의란 '아버지와 스승은 같다'는 것이었으며, '아무리 위대한 이데올로기도 인간을 제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2003년 이문구의 빈소를 찾기 위해 캐나다에서 18시간을 날아온 소설가 박상륭은 이문구를 "군자였고, 선비였으며, 대인이었다"고 회고했다. 40년 이상의 세월을 너나들이로 지내온 노작가가 왜 이런 평가를 했는지 유심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두 번째 이야기] <조선일보>가 주는 상을 받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