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화양연화'는 언제였을까

흐르는 인생의 찬가

등록 2013.09.25 18:56수정 2013.09.26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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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의 뒤끝은 늘 그렇듯이 약간의 허망함과 나른한 피곤함으로 마무리 된다. 가족들이 다시 뿔뿔이 자기 자리로 흩어진 후 오전 일찍 집안 청소를 마치고 남편이랑 영화를 보러 나갔다. 전에 봐둔 <일대종사>.


a  <일대종사> 영화 스틸컷

<일대종사> 영화 스틸컷 ⓒ CGV 무비꼴라쥬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면 매번 그 특유의 분위기에 한동안 젖게 된다. 난 분명 그의 최근작 <일대종사>를 보고 나왔는데 왜 오래전에 보았던 <화양연화>의 그 느낌과 분위기가 겹쳐지는지 모를 일이다. <일대종사>는 내용으로 보자면 중국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이소룡'의 사부였던 '엽문'을 소재로 한 무협 영화다.

픽션과 논픽션이 조합된 우아한 무술 영화 같지만 내겐 "흐르는 인생의 찬가"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무협적 색채가 가미된 <화양연화>"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

그의 영화에서 매번 느껴지는 절제된 시적 대사, 그냥 스쳐 지나치듯 사소하나 인생의 아름다운 절정의 순간들을 정확히 잡아내는 그의 감수성, 인생무상이라는 쓸쓸한 정념, 그러면서도 그윽하게 아름다운 인물들과 이미지 등…. 이미 지나간 인물을 그린 이야기와 시대적 배경, 그리고 그 애잔한 감성 때문에 남편과 나는 오래된 과거로 여행을 다녀온 듯한 느낌이었다.

"왠지 점심으로는 중국음식을 먹어야 할 것 같지 않아?"

남편이 장난스레 말했다. 그 영화관 가까이엔 30년도 훨씬 더 된 유명한 중국집이 있었다. 학생 때 어른들 따라서 몇 번 가본 적이 있지만 그 후로는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그곳에서, 그 시절 그 맛을 생각하며 점심을 먹었다.


아직도 오후 시간은 충분했다. 연휴 끝이라서인지 시내 번화가는 붐볐다. 그저 천천히 예전 기억을 더듬으며 시내 골목길을 걷다보니 30년 전 데이트할 때 자주 가던 찻집이 눈에 띄었다. 지금도 옛 이름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30년 전과 별로 바뀌지 않은 분위기의 그곳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과거와 현재가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도 오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a  30년 전 우리가 자주 갔던 찻집. 찻집도 사람도 그 분위기 그대로 별반 다르지 않다.

30년 전 우리가 자주 갔던 찻집. 찻집도 사람도 그 분위기 그대로 별반 다르지 않다. ⓒ 박현옥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화양연화)이 나에겐 언제였을까…. 30년 전처럼 여전히 여기 지금 있는 나와 남편, 예전의 그 장소에서 같은 차를 마시고 있지만 남편도 나도 이 자리에 앉기까지 30년이란 시간의 통로를 함께 지나왔다.


생각해보니 지금도 그때나 별반 다를 게 없다. 우리 둘 다의 취향도 큰 차이 없이 그대로고, 그때 좋았던 것이 지금도 좋고 그때 싫었던 것은 지금도 싫다.

그냥 지나치면 소소한 것, 사회적, 경제적 가치로만 따지자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 그런 것들 중에서 우리에게 힘이 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 순간의 기억이 한 인간의 내면을 평생 지배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이가 먹으며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오늘 본 영화에 나온 '엽문과 궁이의 대결'이나 서로에게 건네졌던 '단추'의 의미처럼.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화양연화'는 늘 지금이다. 지금이야말로 과거나 현재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자 교차점이며 살아 있는 시간이니까.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내식대로 느끼며 보낸 오후, 그의 영화에서 매번 느끼는 '인생무상'이라는 기분이 그다지 애잔하거나 씁쓸하지만은 않았다. 그 '무상한 인생'을 이만큼이나마 나름대로 살아낸 내 자신에게 오늘은 작은 위로와 격려를 보내고 싶었다.
#일대종사 영화기 #오래된 찻집 #화양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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