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결혼식에 들렀다가 찍은 흔치 않은 부부 사진"평생 아버지처럼 오빠처럼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겠다"던 아버지는 아내를 많이 의지하면서도 경상도 남자의 자존심을 내세웠다.
김효진
다섯 아들 가운데는 일본유학 후 서울에서 은행지점장을 지낸 아들도, 읍내 유지로 시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아들도 있었으니 어깨에 힘주며 살 수도 있었을텐데 드센 며느리들 앞에 쩔쩔매는 시어머니였습니다. 큰오빠가 아버지뻘이었던 어머니 역시 시누이 노릇은 고사하고 오빠네 식솔이 되어 새언니들의 눈칫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큰외삼촌네는 금슬이 참 좋았어. 느그 큰외삼촌이 마누라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허허했으니까. 그 집도 딸 넷에 아들 둘이니 입은 많았지. 아버지랑 딸들이 사이가 좋아서 밤새 이야기꽃이 끊어지지 않는 거야. 큰외숙모가 중학교만 마치고 그만두라는 걸 어떻게든 고등학교는 가야겠더라고. 며칠 밥을 안 먹고 굶었더니 서울 외숙모가 학비를 대겠대. 방학 때마다 서울 올라가서 식모처럼 집안일 다해주고 애들 뒷바라지하고 나면 개학할 때쯤 학비를 주는 거야. 서울에서 돈이 안 내려오면 월사금도 못 냈어. 학비를 못 내면 시험도 치지 말라고 해서 눈물도 꽤나 쏟았지." 고만고만한 또래 여자아이들인 조카들의 틈바구니에서 우리 어머니가 느꼈던 상대적 외로움을 컸을 것입니다. 넉넉지 못하던 시절이니 당연할지 모르지만 큰외숙모는 우리 어머니만 도시락을 싸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내 자식 입에 들어갈 계란프라이 하나라도 아끼려는 에미 마음이었을 겁니다. 덩달아 같은 나이이고 동창생이었던 큰조카 언니도 어머니 때문에 제대로 얻어먹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해. 나랑 나이가 같으니까 피해를 많이 보게 되는 거지. 그렇다고 서울 둘째오빠네서 살기도 싫더라. 살림은 넉넉한데 그 집은 만날 어찌나 싸우는지. 느이 둘째 외숙모가 부잣집 딸이라 기도 펄펄하고 치맛바람이 말도 못했거든. 치마 두른 여장부였지.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핏대를 올리고 자기 분에 거품 물고 기절해 버리는 거야. 속이 시끌시끌해서 여긴 사람 살 데가 아니다 싶었지." 세월이 지나면 아픈 추억은 잊혀지는 법입니다. 더구나 상처 준 사람은 상처 받은 사람의 까맣게 딱지 앉은 마음을 결코 짐작하지 못할 겁니다. 그 시절의 서러움을 누르고 어머니는 기꺼이 큰오빠네 딸들을 식객으로 거뒀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서울로 전근 온 이후 직장생활로 대학교 통학으로 서울에 머물 곳이 필요했던 외사촌 언니들은 길게 짧게 우리 집 식구로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상처 입은 마음 한 켠 그분들께 입은 은혜와 사랑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늘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3대 독자 외동아들인 우리 아버지에게 피붙이라야 누이들뿐이었지만 먼 친척들과 사돈의 팔촌까지 서울나들이에는 으레 우리 집에 머물러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차비를 얻어가는 게 당연한 수순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어디에도 뿌리내릴 수 없는 결핍, 그것을 채우기 위하여 우리 어머니는 가장 가난하고 외로웠던 시절의 아버지에게 정을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쁜 남자의 요소를 모두 갖고 있는 우리 아버지는, 딸로서 이렇게 평하긴 뭣하지만 이기적인 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고백하기 싫지만 어머니와 아버지의 피를 반반씩 물려받은 우리 사남매 역시 어머니께는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내 딸만은 남편 사랑 듬뿍 받고 살기를 바랐는데 30여년을 거슬러 올라 젊디젊었던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우리 어머니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불행하게도 어머니에게는 닥치지 않았으면 좋을 슬픈 일이 또 일어납니다. 자신의 불행을 자식에게만은 대물림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마음일 텐데 그러고 보면 나의 어머니는 참으로 모진 인생을 사신 게 분명합니다.
"살다 살다 그런 꼴을 볼 줄은 몰랐지. 막내가 도어록을 띠리리 열고나니까 대문에 걸쇠가 걸려 있는 거야. 머리끝이 쭈뼛 서더라고. 이혼 조정을 앞두고 있을 때니 그 시간엔 당연히 빈 집일 거라 생각했지.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는데 이상한 예감이 들더라." 사흘 동안 어머니를 오금 저리게 한 그 사건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가난한 남자에게 시집을 온다 해도 영화(?) 누릴 것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우친 어머니는 딸들에게 "절대로 희생할 마음으로 결혼하지 마라"는 이야기를 달고 살았습니다.
부부는 다른 사람은 모르는 치부까지도 공유하는 가장 가까운 사이입니다. 외고집인 우리 아버지에게 맞춰 살았다고는 하지만 애증은 엉겅퀴처럼 어머니의 마음을 좀먹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남편과 아이들을 할퀴기는 고양이 발톱이 되기도 했지요.
새벽에 나가 밤에 들어오는 일벌레 남편과 온 집안을 어질러놓는 어린 사남매. 갑상선 항진증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죽 한 그릇 끓여주는 사람 없이 앓아 눕곤 했습니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사남매의 성장기에 육아경험이 전무했던 어머니는 이끌어주고 등 두드려 주는 사람 없이 한없이 외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막내딸이 사랑 하나로 결혼한다고 했을 때 말렸지만 마지막엔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같지 않게 양가에 손 벌리지 않고 결혼을 준비하는 모습이 기특하다고 했습니다. 붙박이 가구며 집기가 달린 오피스텔에서 단출하게 신접살림을 시작한 젊은 부부는 어머니의 자랑이었습니다.
우리 막내가 결혼했을 때는 강해 보였으나 역경의 파도 앞에 한없이 심약했던 우리 아버지가 IMF라는 거대한 태풍을 맞고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한 후였는데요. 하루아침에 지하 월세집으로 추락했던 시절, 우리 사남매가 모두 대학을 마칠 정도로 장성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습니다. 그런데 5년이 지나지 않아 믿거라 했던 사위는 어머니의 눈에 피눈물을 쏟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무서운 진실 막내가 이혼하겠다고 혼자 법원에 이혼서류를 냈을 때도 마지막까지 두 사람이 화해하기를 바라던 어머니는 그날 그 자리에서 더 이상은 돌이킬 수 없다는 걸 깨달았던 모양입니다. 여자의 직감으로 남편의 수상한 낌새를 맡아도 헤어질 것이 아니니까 평생 뒷조사 같은 것은 해본 적 없는 어머니였습니다. 남편을 의심하는 아내들은 더러 사설 기관에 의뢰해 결정적 증거를 잡기도 한다지만, 이혼을 할 때 하더라도 깨끗하게 합의 이혼으로, 뒤돌아 서더라도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잘 지내길 바랐던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그날 끝끝내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현장과 마주친 것입니다.
"심장이 덜컹덜컹 내려앉는 줄 알았다. 막무가내로 문을 닫으려는 걸 막내가 발을 밀고 들어가 짐을 챙겨왔지." "그럴 때 경찰을 불러야 한다던데. 그래야 하는 거 아냐? 엄마 참 바보다." "머릿속에서 사이다 기포가 뽀글뽀글 터지는데 아무 생각도 안 나더라. 저걸 어떡해? 저걸 어떡해? 입만 마르고." 막내의 이혼은 "이혼은 없다"던 우리 집안에서는 충격이었습니다. 갓난쟁이들이 걸음마에 익숙해지고 하루하루 말이 늘 때였습니다. 세 살짜리 쌍둥이 아이가 둘이나 달린 싱글맘이라니. 부모의 불화를 피부로 눈치 챈 아이들은 한 번씩 그악스럽게 울어댔습니다.
주변에서는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냥 묻어두고 살라고, 여자는 약자니까 아이들은 아빠 쪽에 떼버리고 오라고, 애기엄마가 젊으니까 이 꼴 저 꼴 보지 말고 팔자나 고치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조언들을 건넸습니다. 우리는 가족이기에 막내의 아픔에 반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었을 뿐이지 세상은 냉정했습니다.
"둘이 사이가 그렇게 벌어진 줄을 몰랐어. 막내가 좀 입이 무거워. 3년을 참았다는데 까맣게 몰랐지. 죽고 못 사는 부부인 줄만 알았거든. 어떻게든 살아보게 하려고 애들 아빠한테 '서로 이해하며 지내라'고 하니까 '외롭다'면서 눈시울이 글썽글썽하더라. 쌍둥이 밑에 들어가는 게 좀 많아? 생활비 대느라 밤늦게까지 힘들겠지. 하루 종일 애 둘이랑 씨름하면서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나면 녹초가 되는 니 동생도 불쌍하고." 가만히 끊으려 해도 진흙탕 싸움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 이혼입니다. 갈라서고 싶은 수많은 순간을 견뎌 온 우리 어머니에게 저도 "아빠와 이혼하라"고 권한 적이 있습니다. 아내를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아버지와 사랑 받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는 것이 괴로웠기 때문입니다.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가 폭탄 터지듯 터져 나오는 부부 간의 앙금도 그렇고, 십년이 넘어도 이십 년이 넘어도 똑같은 말싸움이 되풀이되는 영원히 상황에 지친 탓입니다.
부부에게 사랑이란 열정보다는 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