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면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다
하주성
중요한 신라역사를 알 수 있는 탑비무염이 이 이 절에서 선(禪)을 널리 알리고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다. 그 뒤 이곳에서 생활을 하고 있던 무염이 진성여왕 2년인 888년,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려주었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다. 비 몸돌에 새겨진 비문은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다.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인 890년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비를 세운 지 벌써 1123년이나 되었다.
이 비에 적힌 기록을 보면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이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 자료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 비는 성주사 절터 서북쪽에 세워져 있는데,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 보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