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유교화 과정>┃지은이 마르티나 도이힐러┃옮긴이 이훈상┃펴낸곳 너머북스┃2013.10.21┃2만 7000원
임윤수
이 책에서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는 조선 500년으로 상징되는 유교가 어떤 과정을 거쳐 조선에 도입되고, 어떻게 조선사회를 유교화 시켜 나갔는지를 가족과 제사문화, 그리고 그곳에 스며든 의례절차와 가치 등을 통해 살펴보고 설명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추구하고 있는 시대적 가치는 '민주주의'입니다. 대한민국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고 땅에서 불쑥 솟아오른 개벽천지의 나라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이전에 조선(1392~1910)이 있었고, 조선은 고려(918~1392)가 있은 후에야 있었습니다. 고려에서 조선,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이어지질 때마다 각각의 나라에서 추구하던 시대적 가치는 달랐습니다.
시대적 가치라는 말로 아우르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깃듯 요소들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해 단절되지 않습니다. 관성을 갖고 적응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다보면 화면이 겹쳐지며 서서히 다른 화면으로 대체되는 것처럼 역사에 포함되는 가치들 역시 서서히 등장하며 정착합니다. 또 퇴색될 때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게 아니라 페이딩(fading) 효과를 길게 넣은 영화장면처럼 관성을 나타내며 서서히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 유교의 뒤안길에서 한국 봤을 것 '유교'는 조선시대를 상징하지만, 1392년을 기점으로 하고 있는 조선의 역사처럼 어느 해를 기준으로 해 불현듯 등장하는 가치가 아닙니다. 조선이 사라졌다고 해서 동시에 함께 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문화는 100년쯤의 관성을 갖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가 서울대 성균관에서 유교를 연구할 때(1967~1969)는 유교의 관성이 아직은 진하게 남아있었던, 유교의 뒤안길 같은 시대라 생각됩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가정사에서 갈등을 유발시키는 대표적 사례로 자주 손꼽히는 일은 제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요즘, 제사가 갖는 의미를 제대로 새기며 지내는 집안 또한 흔치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선조 때부터 지내던 것이니 지내야 한다거나, 남들도 다 지내니 우리도 지내야 한다는 관습 정도로 여기며 지내는 집도 없지 않을 겁니다.
제사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자기 출계집단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사회적·의례적 기준을 규정하였다. 의례상 지위, 역학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상속권과 상복 의무다. 유교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정치적인 또는 공공의 영역은 가(家)가 직접 확장된 것으로 보았으므로 집안에서의 구속 시준은 공적 세계의 기회에도 적용되었다. 출계집단에서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인정받은 이들만이 정치 역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었다. 사회 질서를 세우는데 제사를 중요시하게 되자 그 누구보다도 서자와 여성이 차별을 받았는데, 이들은 의례 체계에는 맞지 않았다. -<한국의 유교화 과정> 385쪽시대적 가치가 달라지고 제사가 갖는 역학적 상관관계 또한 뒷받침 되지 않는 요즘에, 제사가 갖는 의미나 제도라고 해서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할 가치일 수는 없을 겁니다. 의미도 모른 채 지내야 하는 제사는 며느리들에겐 부엌노동만을 강요당하는 고역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사가 갖는 의미와 제사에 포함된 상관관계를 충분히 알게 된다면 제사가 달리 생각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 때문에 발생하는 갈등 또한 관성에 따라 점차 해소 될 거라는 것을 알기에 마음의 여유를 기대할 수도 있을 겁니다.
등산을 하다 산허리에 낀 멋진 운해를 본 사람들이 감탄을 하고 있을 때, 정작 운해가 낀 산허리 길을 걷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 멋진 운해 속에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가 그랬을 겁니다. 유교적 가치가 산허리에 낀 운해처럼 아직은 관성으로나마 남아있는 시대를 살면서도 정작 유교가 뭔지를 제대로 고민해 보지도 않고 살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운해 속에서는 운해를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알갱이처럼 떠도는 수분을 통해 온 몸으로 느낄 수는 있을 겁니다. 운해 속에서 운해를 느끼려면 운해가 형성될 수 있는 물리적 조건 등을 알아야 압니다. 유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유교 속에서 유교를 제대로 알려면 유교가 포함하고 있는 시대적 가치와 도입 과정이나 배경 등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00댁'이 첩을 부르는 소리?이 책을 읽는 내내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과 '제 눈으로는 제 얼굴 보지 못한다'는 말이 갖는 의미를 여러 곳에서 새겼습니다. 고리타분한 요식 행위로만 생각하던 제사, 필요 없이 복잡하게만 생각되는 족보(친인척관계)에 담긴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요소들을 서양인 학자가 너무 쉽고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