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비엔날레에 젊음을 수혈해야..."

[주장] 2014 부산 비엔날레 총감독 선정과 관련하여

등록 2013.10.31 16:45수정 2013.11.05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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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트임'으로서 비엔날레

부산에서 처음 비엔날레가 개최될 때 나의 감회는 어쩌면 이번 철학 축제 '멈춰라 생각하라'와 비슷한 것인지도 모른다.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부산과 미술학연이 없었기에 제3의 시각을 가지기에 유리한 조건이었고 더욱이 독일에서 막 귀국한 때여서 당시 부산의 보수적인 미술계가 답답하게 느껴지던 때였다.


동서의 문화를 체험하고 '새로운 전통 만들기'를 고민하던 젊은 작가로서 부산에서 국제적인 현대미술전이 개최됨은 모든 새로운 시도와 사건이 발발했을 때 풀어야 할 과제는 차치하더라도 젊은 미술인의 한사람으로서 우선적으로 반가운 일이었다.

'공산주의 컨퍼런스'를 여는 것에 대한 통쾌함에 비교될 만큼은 아니라 하더라도 당시 변화를 열망하는 한 시민으로서 부산 비엔날레에 대한 기대감은 지리적으로 개방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해양도시에서 '변해야 할 것들이 변하지 않은 것에 대한 숨트임'으로 작동하는 듯 했다.

딱딱하고 고정된 세상이 변할 때는 처음부터 이상적인 대안이 배달되는 게 아니라 동기가 될 만한 '사건'에서부터 비롯된다. 광주비엔날레와 마찬가지로 그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비엔날레지만, 초창기의 부산 비엔날레는 부산에게 볼거리 이상의 여운을 남겼다.

정면적으로는 시민들에게 낯설고 불편하고 충격적인 구경거리를 제공했고 측면적으로는 당시 성행하던 포스트 모더니즘의 파티였으며, 후면적으로는 한국 미술의 쌍두마차였던 서울대와 홍대가 굳히기 해놓은 아성에 균열을 가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계원 예대와 한예종 그리고 경원대와 한성대같은 미술대학이 새로 생겨나거나 약진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며 그 영향은 서서히 전국적으로 젊은 작가 지망생들에게도 파급되었다. 그 결과 과거 구상과 추상이라는 양극화가 뚜렷했던 시절, 국전이나 대학미전에서 심사에 들어간 교수가 작품 스타일만 보고 제자 작품인줄 알고 잘못 당선시킨 공모전 촌극의 빈도수를 낮춰주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다시 숨막히다

개막을 11개월을 앞둔 부산 비엔날레는 원래 올해 초 선임되어야 할 운영위원장 선정이 늦어진데다, 뒤늦게 운영위원장으로 임명된 오광수 현 한솔뮤지엄관장에 대해 일부 시민단체들이 투명 공개를 주장하고 나섰다.


얼마 전 부산 비엔날레의 오광수 운영위원장은 미술의 평준화를 우려하며 오히려 한국미술을 독점 독식하던 쌍두마차를 그리워하는 듯한 심경을 한 지면을 통해 공공연하게 밝힌바 있다.

당신 자신이 그에 따른 문제점도 의식하면서 "... 예술은 일종의 관습에 의해 전승된다. 관습의 축적이 없다면 전통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연륜이 있는 교육기관일수록 관습은 풍부한 내면을 지니는 것이다... 학교마다 독특한 분위기가 있고 그것이 어우러지면서 한국화단이란 사회 - 미술사회를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등장하는 신진들의 작품은 오랜 관습으로서의 공동체 의식은 찾아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개별성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라며 예술의 평준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로 마치 박정권 이후 유신을 예찬하는 목소리가 공공연하게 떠도는 것처럼 오광수 위원장도 과거에 대한 향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미술의 키워드는 '관습타파'에 가깝다. 그래서 성실하기만 한 학생보다 삐딱한 시각을 가진 학생이 시선을 당기는 것이 오늘날 미술 교육 현장이어야 한다. 따라서 오광수 위원장의 우려는 예술의 평준화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서가 아니라 당시 미술 제도권의 주도권을 잡고 독식했던 서울대 홍대라는 양극 현상에 대한 그리움으로 유추 해석되서 불편해 하는 미술인들이 상당히 많다.

물론 그 시대에는 그랬다. 당시에 서구에서 유행하던 예술을 받아들여 특허인양 한 평생 우려먹으며 스스로 혹은 제자들이 'WHY(왜)'라는 질문보다 'HOW(어떻게)'제작하고 어떻게 예술 권력을 유지하는 것에 골몰했던 것을 한국판 에꼴이고 학풍인양 훈육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스템에서 훈육된 제자들이 다시 능숙하게 학위만 따오거나 혹은 국내의 디지털 대중화 덕분에 최신정보를 통해 외양만 새로운 작품을 생산하며 아류를 양성해왔다.

그 증거로 한국 최고의 미술대학 출신들이 작품외양이 비슷해서 존경하는 작가를 찾아 다른 대륙으로 날아갔으나 작품 속이 다르다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하거나 이론 강의에서 현대미술을 이해 못한다는 이유로 배제되는 사례들이 아직도 속출하고 있다.

그들 앞에서 서양의 문화우월주의 라며 대항하기 전에 자신이 이제까지 배운 것으로 질문에 답하거나 항변해보지도 못하고 단번에 깨지는 굴욕을 작가 지망생의 게으른 탐구력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글로벌한 시대에 현대미술을 (도제식은 아니더라도) 르네상스 시대의 지역 공동체가 주는 영향을 결정적인 화풍으로 강조하는 미술계 어른들은 후배 예술가 세대가 국내외에서 겪는 고통에 직무유기를 통감해야 한다.

물론 그런 2세대 잡가 중에는 유학가서 기술껏 학위만 따오거나 국내에서 능숙한 처세로 미술계에 인간성 좋은 젊은이로 이미지 관리해서 스타작가가 되거나 대학에 들어가 3세대인 현재의 2030세대 제자들에게 (그 학교 출신들이 작가로 성공 못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도권과의 인맥이라고 진단하며) '예술가로 크는 법'으로 술자리 사교하기나 유명작가나 문화 권력자에게 로비하는 방법을 여전히 목에 핏대 세워 강조하는 이들이 있다.

서양미술사를 주류 미술사로 배우는 상황에서 비서구권 예술 지망생들의 숙제는 얼마나 많던가! 예술의 근거가 되는 토양을 갖기 위해 숱한 의문과 고민들을 던지거나 풀기위해 공부하고 토론하는 극소수의 미술동네를 제외하면 아직도 그렇게 한국의 현대미술은 패션쇼 무대뒤편 풍경처럼 겉옷만 급하게 갈아입는 쇼에서 제대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차라리 랑시에르가 말하는 무지한 스승이면 나을 터인데 무지한 스승보다 시대에 무지몽매하거나 탐욕스런 어른들이 현대미술과 관련된 요직을 꿰차고 있는 것이 오늘날 부산이든 평창이든 비엔날레의 허구 1번지 풍속도다.

따라서 이번 부산 비엔날레 운영위원장의 낙하산 임용 의문에 법적인 증거 이전에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그 분이 현대미술전인 부산 비엔날레 운영위원장으로서 자격없음은 최근의 입장과 태도만 봐도 잘 알수 있다. 따라서 그 분이 과거에는 한국미술계의 거물급 인사였는지 몰라도 지금은 한국 현대 미술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또한 이번 비엔날레 총감독 선정에 빚어진 구태에서 부산 비엔날레 운영위원장뿐 아니라 부산 시립 미술관 관장이라는 지역 미술계 어른의 태도 또한 현대 미술을 농락하고 그들에 의해 현대미술 정신은 훼손되고 있다. 이래도 미술과 정치를 별개라고 절교하는 멍청한 미술인 친구가 있을까?

작품 목소리? 안 들려!

한국이 경제 성장과 함께 문화예술에 인프라가 형성되면서 유치 가능했던 비엔날레가 해를 거듭하면서 세상은 과연 작품 속과 주변을 감도는 담론처럼 진보했는지, 이 시점에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글로벌 자본주의가 만발한 영토에서는 마치 예수의 부활을 속으로는 믿지 않으면서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신자들처럼, 예술가 스스로 '예술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신화를 믿는 순진한 미술인조차 몇 안 될 것이다.

그동안 이론 수입처를 통해 숨가프게 동시대 철학과 담론이 유입되고 충돌하면서 새롭거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과 재능있는 작가들이 등장했다 사라지면서 미술관은 많은 관람객들을 유치해왔다. 지금 그 결과를 미술사의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미술 전시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새삼 확인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에 와있다.

이제까지 많은 문화행사와 전시가 있었음에도 예술이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주거나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치유력까지 발휘했어도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했다면, 아니 미술이 미술계만이라도 제대로 변화시키고 진보된 영역으로 만들었는지를 묻는다면, 그것조차 우문이자 헛된 믿음일까?

이제껏 미술계 지식인 역할을 하던 첨단의 이론가나 전시 기획자의 기획에 따라 스펙터클한 전시장에서 '작품이 대신 말한다'고 작가들이 별 실험 다해봤지만 지금 우리 귓가에 남은 건 작품의 목소리가 아니고 작품의 무늬일 뿐임은 작금의 후퇴한 정치권이며 미술계가 잘 증명하고 있다. 그러니 이제 미술인들도 작품 혼자 말하게 하지말고 직접 알아듣게 말해야 한다.

비엔날레와 별 상관없는 무위예술가로서 나는 평소에 비엔날레의 허구성을 논할 때가 되었다고 말해왔는데 지금이 그때가 아닌가 한다. 현재 부산 비엔날레를 급노화시켜서 비틀거리게 만든 이는 누구일까? 당연히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처럼 멈춰서 생각하는 A씨가 아니라 비엔날레 운영위원들의 심사결과를 번복해서 원인 제공을 한 토호 세력과 정치권력과 연계된 보수예술 문화권력이다.

제도권 전시만으론 혁명불가

그동안 전시장에 여러 반란들이 있었다. 행사 주제명으로 급진적인 것을 따지자면, <미술관 습격 사건>이라는 전시가 2009년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있었지만 전시로서 미술관 습격은 여전히 깜찍하고 말랑말랑한 귀염둥이 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경기도 미술관에서 있었던 <악동들 지금 여기>전은 포스트 민중미술을 한 눈에 볼수 있었어 좋았지만 더 기대했던 '작가와의 대화'에 참석한 관객과 작가에게 바람을 맞혔다. 그리고 5년 전 현대미술사학회에서 '우리가 혁명이다''는 주제의 요셉 보이스의 심포지움이 있었지만, 성실하고 충실한 학회였을 뿐이지 과히 혁명적이지는 못했다.

충실한 학회의 주제를 제공한 베를린 함부르그 반호프 미술관 관장의 요셉 보이스의 전시와 발제 역시 한 작가의 작품에 대한 진지한 보고서였고 정작 요셉 보이스의 혁명성을 느낄만한 내용은 빠져있었다. 원래 미술계라는 제도가 그려내는 범주는 거기까지다. 그렇다면 오늘날 미술에서 혁명은 어디에 있는가? 혁명은 제도권의 전시장이나 학회가 아닌 늘 다른 곳에서 일어난다.

개막을 앞두고 멈춰버린 부산 비엔날레는 이제 젊은 피를 수혈 받을 때가 되었다. 미술계에 서구의 좌파이론이 들어온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고 그런 주제로 발 빠르게 전시를 기획하고 글을 쓰며 작품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명품급 미술인들은 향기만 날리며 지나갔다. 이제 그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젊은 미술인들의 야수성으로 현대미술의 정신이 무엇인지 보여줄 때다. 밀란 쿤데라와 사무엘 베케트 그리고 심보선의 말로 엮는다.

"모든 것은 잊힐 뿐이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오류를 고쳐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헛된 것이라고 해도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더 잘 실패하는 사람이 되는거다. 그렇지 않으면 속물에게 착취당하거나 농락당하는 동물이 되니까."
#부산 비엔날레 #부산 비엔날레 총감독 선정 #오광수 운영위원장 #부산시립미술관장 #현대미술 정신 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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