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열규 교수님이 혈액암으로 투병하던 무렵부터 우연치 않게 시골집을 리모델링하고 있다.
이상옥
내가 작금에 그동안 방치해두었던 고성의 시골집을 리모델링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 김열규 교수님이 19년 귀향하여 매년 1권 이상의 명저를 남겼듯이, 나도 시골집에 기거하며 '책 읽기', '글 쓰기'에 매진하고 싶기 때문일까.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하니, 입신(立身)하여 양명(揚名)하면 되는 것인가.
<효경(孝經)>에 입신양명(立身揚名)이라는 말이 나온다. 몸을 세워 이름을 높여서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를 낳아준 부모에게도 존경심을 갖게 하는 것이 사나이 대장부의 할 일인 것처럼 가르친다. 이것이 동아시아 유교사회의 지식인의 가는 길이었다. 학문으로 지식과 인격을 연마하여 과거급제하고 출세하여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하는 것.
그러면 '귀거래사(歸去來辭)'라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진정한 선비는 벼슬에 나아가는 것만을 능사로 여기지는 않았다. 난세를 만나 협잡과 권모술수가 난무하여 바른 뜻을 성취해 낼 수 없다고 판단되면, 미련 없이 벼슬길을 버리고 낙향하여 자신의 양심을 지키며 후학들을 가르쳐 후일을 도모했던 것.
도연명은 출처진퇴(出處進退)의 상징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출처진퇴는 사마광의 말로, 군자란 직책을 내리려 해도 사양해서 좀처럼 받아들이려 하지 말아야 하고, 자리를 떠나도록 지시받으면 지체하지 않고 물러나는 것, 즉 출처진퇴가 깨끗해야 군자이다. 도연명은 구차하게 관직에 연연하지 않았다. 도연명 시대는 천하가 어지러운 때여서 선비들은 스스로 초야에 묻혀 지내려 했다.
도연명은 자연을 좋아하고 세상 벼슬을 멀리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워낙 궁핍하여 친척이 말단 관직을 하나 알선해주었는데, 오늘의 면장쯤 되는 자리였다. 그런데 하루는 상사가 순시를 나가니 관아를 정돈하고 의관을 단정히 하여 대기하라는 통지를 받고서는 저 유명한 "오불능위오두미절요(吾不能爲五斗米折腰!)", 즉 "내 어찌 쌀 다섯 말 때문에, 허리를 굽힐 수 있으랴!" 하고는 사표를 내고 귀향하여 귀거래사를 썼던 것이다.
도연명은 작은 고을 수령이라는 공직에서조차 지조를 굽혀야만 하는 현실 앞에서 벼슬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자연과 시와 더불어 무위자연의 삶을 살았다.
오늘날 좁쌀만 한 명예와 권세를 탐하다 망한 사람이 한둘 아니다. 정약용은 헛된 명예가 다가 오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 하여 '도명(逃名)'을 말하였고, 오지 않는 명예를 찾아 좇아 다니는 '요명(要名)' 또한 삼가라 했다. 물론 양명(揚名)으로, 이름을 세상에 알릴 기회가 오면 순리대로 받으라 했지만,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감투 하나 쓰고 우쭐대면 그건 양명이 아니라 오명(汚名)이 될 것임을 경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