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의 대형정미소 미선공들 작업 모습(1930년대)
조종안
일제의 살벌한 감시에도 군산의 노동운동은 범시민적으로 전개된다. 1924년 3월 낙합정미소 정미공 2600여명 파업, 1926년 11월 군산정미소 노동자 1000여 명 동맹파업, 1927년 5월 군산역 인력거차부 80명 파업, 그해 가을 군산정미소 총파업, 1934년 가등정미소 여공 파업 등이 있었다. 악덕 경영주들의 일방적인 임금 삭감과 일본인 감시원들의 몸수색, 성희롱 등에 맞서 조합결성과 파업으로 대항했던 것.
1927년 1월 21일 조선인 소상공인 7~8명은 회합을 하고 군산상업회사(群山商業會社)를 출범시킨다. 생필품인 면사포, 신탄(숯, 석탄) 등을 30년 가까이 일본에서 공급받아 사용해온 것을 가슴 아파하던 그들은 회사설립 후 주식 모집도 하였다. 그들은 신탄, 승입(가마니, 새끼줄), 수산물, 비료, 곡물 등을 위탁하여 판매하는 대리업을 했으며 발기인은 이근삼을 비롯해 이근영, 김기태, 신사선, 조성삼, 정두언 등이었다.
이근삼은 일본인 미곡 중개업자들의 횡포로 억울하게 피해를 보는 소작농과 소상인들 권익 보호에도 앞장선다. 군산은 1920년 이후 일인 지주를 옹호하는 소작조합이 문제가 되고 있었는데, 그는 1929년 10월 9일 뜻을 같이하는 10여 명과 강호정(죽성로) 박영희씨 집에서 간담회를 열고 상인들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히는 연미중개점(延米仲介店) 철폐운동을 결의하는 등 일본 업자들의 횡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군산의 정미소 미선공 항쟁과 서수농민 항쟁 중심에는 일제와는 절대 타협할 수 없다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이 단합하여 만든 신간회(新幹會)가 있었다. 1927년 6월 12일 군산 유치원에서 설립대회를 치른 군산 신간회(초대 지회장 김현창)는 지회장 식사(式辭)와 내빈 축사(祝辭)조차 왜경의 감시와 제지를 받으면서도 사회운동을 펼쳐나갔다.
경술국치(1910) 이후 소작농으로 전락한 조선 농민의 항일항쟁(소작쟁의)은 삼일운동이 일어나는 1919년부터 소작쟁의가 봉쇄되는 1939년까지 21년 동안 전국적으로 14만 1천여 건 일어났으며, 전북에서만 2만 1천 730건의 크고 작은 항쟁이 있었다. 그중 '이엽사농장 소작쟁의'(1927년 8월 9일~1928년 9월 29일)가 가장 큰 규모의 항쟁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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