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재자투표 부정선거를 고발중인 이지문 중위군 부재자투표 과정에서 일어난 선거부정을 목격한 이지문 중위는 1992년 3월 22일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를 찾아 양심선언을 한다. 그의 고발 이후 군 부재자 투표는 영외에서 하도록 선거법이 바뀌었다.
경실련
"1992년 군 부재자투표... 1번 찍으라면서 공개투표 했다"- 여러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내가 내부고발을 할 때만 해도 군, 정보기관, 행정기관이 동원된 선거 개입이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마련됐고,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은 사라졌다고 믿었다. 지금은 이런 신뢰가 산산 조각났다. 우리 민주주의가 이 정도였나? 그런데 사회적 공분은 너무 약해졌다. 20년 전에는 관권선거, 부정선거에 대한 내부고발을 인정해 주는 분위기가 있었다. 지금은 이런 제보나 고발을 하면, 권은희 수사과장 사례처럼 출신 지역이나 이념, 지향을 의심하며 그 뜻을 왜곡한다.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하는 국민정서도 문제다."
- 1992년 선거부정 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다. "그때는 작년처럼 총선과 대선이 같은 해에 있었다. 연대장이 대대 병력이 모인 자리에서 '지금 대통령이 (득표율) 36.6%로 당선했는데, 북한이 대남방송으로 정당성 시비를 걸고 있다. 이럴 때 더욱 안정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말하고 갔다. 그 즉시 대대장이 장교하고 직업하사관을 소집해서 '국군 최고 통수권자는 누구냐? 대통령이다. 소속당이 어디냐? 민자당이다. 대통령이 속해 있는 여당에 투표하는 것이 충성이라 생각한다. 간부들도 자기 병력에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다."
- 그 지시는 어떻게 이행됐나?"당시, 4월에 있을 장교 인사고과에 여당지지 득표율이 반영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우리 대대에 속한 5개 중대 중 한 중대에서는 중대장이 보는 앞에서 여당을 찍도록 공개투표를 했다. 인사계 주임상사가 보는 앞에서 공개투표를 하거나, '1번을 찍으라'고 정신교육을 받은 중대도 있다. 우리 중대장은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분이었는데, '군이 왜 정치에 개입하는지 모르겠다. 내버려 두라'고 했다. 그래서 100명 정도인 우리 중대에서 투표용지가 먼저 온 나를 포함한 13명은 소신껏 투표했다. 그랬더니 대대장이 나를 불렀다. '중대장이 (1번을 강요)하지 않으면 소대장인 너라도 나서야 아는 것 아니냐? 난 네가 누구를 찍었는지 알 수 있지만 알아보지는 않겠다'는 식으로 협박했다."
- 그래도 그 중대장은 양심적인 군인이었다. "그랬다. 그런데 중대장에게 기무사에서 연대에 파견한 보안반장이 찾아왔다. 보안반장과 한 30분 정도 대화한 후 중대장이 소대장들을 불렀다. 서신검열기로 우리가 누구를 찍었는지 다 파악하니, 우리 중대가 문제되면 대대와 연대에도 파급효과가 미친다, 여당 지지가 낮으면 안 된다고 했다더라. 물론 국방부에서는 서신검열기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육사 나온 중대장은 서신검열기가 존재하고 투표 결과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중대장은 소신을 접었다. 중대원들을 모아 놓고 '아직 마음 안 정했으면 1번 찍어달라'고 했다. 그 정도면 최소한의 시늉만 한 거다."
- 그런 건 처음 있는 일이었나?"군 부재자투표가 그렇게 진행된 건, 1970~1980년대 군대 갔던 사람들에게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런데 1991년 지방선거 할 때 (부정선거 없이) 그냥 투표하게 했는데, 야당표가 너무 많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군이 다시 움직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나는 말단 소대장이어서 어느 정도 규모로 선거 부정이 진행됐는지 모르지만, 우리 대대에서는 분명히 선거부정이 있었다. 기무사에서 연대로 파견한 기무반장의 태도를 봤을 때 결코 우리 대대나 연대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양심선언으로 선거 제도 바뀌었다"- 그래서 시민단체를 찾아가 폭로했나?"내가 부정선거를 폭로하기 바로 직전, 공군 ○○○사령부 사령관이 여당 찍으라는 정신교육을 했다는 기사가 났다. 정치군인들이 다시 나선다고 봤고, 막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군대 안에서 투표하면 공정한 통제가 어렵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와서 참관을 하거나, 공정한 제도 마련을 위해 시민단체가 운동이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공선협에 찾아갔다."
- 기자회견 후 바로 구속됐다. "무단이탈 때문이다. 위수지역(부대가 있는 인근 지역)을 벗어날 때는 대대장에게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보고하면 당연히 안 보내 줄 테니까 그냥 나왔다. 당시는 인터넷도, 핸드폰도 없던 때다. 공중전화도 보안이 안 되니, 직접 찾아갈 수밖에 없지 않나. 일요일 비번시간을 이용해 서울로 갔다. 무단이탈을 이유로 기자회견 직후 바로 구속됐다. 군은 명예훼손도 적용했다. 기자회견 후 군에서 합동조사단을 만들어 내가 속한 대대원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다. '이지문 중위 이야기가 사실인가? 정말 여당 지지 정신교육이나 공개투표가 있었느냐?'고 물었는데, 단 한 명도 사실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국방부에서는 사실무근이라고 공식 발표하고, 내가 장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 재판은 받았나?"기소유예 됐다. 기소해서 재판으로 가면 계속 쟁점이 되니까 위에서 부담스러워 했다. 기소유예로 석방하는 대신 이등병으로 강등, 파면됐다. 1995년 2월 대법 판결로 중위 신분을 회복했다. 대대 군인 중 전역한 장교 1명과 역시 전역한 사병 2명이 재판에 나와서 공개 투표한 사실이 있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무단이탈은 징계사유지만, (부정선거 폭로) 증언은 사실이라 파면은 재량권을 넘어선 지나친 처사'라고 결정했다."
- 쉽지 않은 선택과 용기였는데, 이후 바뀐 것은 뭔가?"선거제도가 바뀌었다. 그 해 대통령 선거부터 영외 투표, 그러니까 군대 밖 민간에서 투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공개투표가 원천적으로 차단됐다"
"난 데모 한 번 안해 본 부산 출신"- 두렵지는 않았나?"1990년에 큰 내부고발 두 개가 있었다. 이문옥 감사관이 감사원의 재벌비리 은폐 사실을 폭로했고,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했다. 이문옥 감사관은 비밀누설 혐의로 형사처벌 받았고, 윤 이병도 1992년 당시에는 2년째 수배중이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알았기에 내가 고발하면 군 감옥에서 몇년 썩는 게 아닌가 싶었다. 사회에 나오더라도 삼성그룹 특채 입사도 취소될 것이고... 뭘 먹고 살아야 하나,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것 아닌가 싶었다. 내가 87학번이지만, 한 번도 시위에 참여한 적은 없었다."
- 단 한 번도? 어떤 언론은 '6월항쟁 때 데모대를 따라다녔을 수도 있다' 보도했는데."잘못된 기사다. 단 한 번도 없었다. 완전한 비운동권이었다. 시위대 끝자락에도 선 적이 없다. 그래서 '혹시 잘못 되면 운동하면 되지 뭐'라는 생각도 못했다. 집에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으니, 앞날에 대한 걱정이 제일 컸다. 큰누님 남편이 육사 나온 직업군인이었는데, 나 때문에 피해를 볼까 걱정됐다.
하지만 제일 큰 걱정이면서, 가장 큰 (고발) 동기는 우리 중대장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선거부정에) 참여한 중대장도 나 때문에 처벌받을 수 있고, 부하 관리를 잘못한 책임으로 징계받을 수 있으니까. 인간적인 미안함이 컸다. 만약 이 분이 대놓고 선거부정을 강요했다면 덜 미안했을 거다."
- 고향은 어딘가."경남 양산에서 태어났는데, 출생신고를 부산에서 했다. 그래서 (양심선언) 기자회견문에는 '부산 생'이라고 적었다. 그때는 왜 공선협에서 고향을 적는지 몰랐다. 만일 내 고향이 호남이었다면 '민주당 지지하려고 양심선언 했다'는 공격을 우려해 그랬던 것 같다. 권은희 과장이 그렇게 공격받지 않았나? 양심선언을 물타기 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이다. '너 호남 출신이지?' '저 사람은 좌빨(좌익 빨갱이)이다' 하는 것이다. 나에게도 '운동권이 사주한 것 아니냐'고 했지만, 데모 한 번 안 한 부산 출신이어서 그런 공격은 없었다."
- 내부고발을 대하는 자세가 그때와 달라진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몇 달 전, 한 극우단체가 운영하는 인터넷 매체에서 내 이름을 봤다. 칼럼이었는데, 이문옥, 윤석양, 이지문은 호남출신이라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잘 먹고 잘 살았고, 비호남 내부고발자는 차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권은희 과장 이야기로 시끄러울 때였다. 내가 바로 전화해서 내 고향은 호남도 아니고, 출신 지역을 따지는 그런 칼럼은 온당하지 않다고 항의했다. 그랬더니 칼럼에서 내 이름만 쏙 뺐더라. 내부고발은 이념과 출신 지역에 따라 하는 게 아니다.(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상식과 합리성,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내부고발 이후 힘들었지만... 후회는 없다"- 내부 고발 이후 어땠나?"군에서 바로 나와 다행히 '왕따'는 겪지 않았다. 삼성그룹을 찾아갔더니 '우리는 장교특채를 했는데 넌 이등병이라 입사 자체가 무효'라고 하더라. 1995년 대법원에서 파면이 취소돼 다시 찾아갔더니 '인사기록이 소멸됐다, 다시 시험 보라'고 하더라. 2010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아 다시 찾아갔더니 '일할 수 있는 곳이 없다'고 했다."
- 그래도 유명 인사였는데,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없었나?"공무원은 파면 당하면 5년 동안 공직에 못 나간다. 군에서 25살에 나왔으니,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당시 국민당을 만들어 대선을 준비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아들 정몽준 의원이 ROTC선배였다. 내가 구속됐을 때 국민당과 현대그룹이 석방 촉구 서명운동을 열심히 해줬다. 나중에 정주영씨가 입당을 권했는데 거절했다. 정몽준씨가 '현대에서 받아줄 테니 시험을 보라'해서 원서는 냈는데, 필기시험 날에 가지 않았다. 실력이 아닌 내부고발로 부당한 특혜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더라. 또, 입사하면 선거 때 이용당할 수도 있고."
- 그럼 어떻게 살았나?"1993년 여름부터 을지로 인쇄골목에 사무실을 얻었다. 시민단체 자료집 등을 인쇄하는 일을 했다. 1년 반 동안 한 달에 2백만 원 정도 벌었다. 불안했다. 동기들은 삼성에 들어갔는데, 난 호구지책이었다. 요새 <응답하라 1994>가 방송돼 '난 그 때 뭐 했나' 돌아봤더니,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 그때는 양심선언을 조금 후회했을 것 같다. "내 양심선언으로 영외 투표로 바뀌었으니, 안 한 것보다는 한 게 나았다. 어쨌든 잘못 된 것을 밝혔으니까. 내 삶은 개인의 문제일 뿐이다."
- 그럼 지금 하고 있는 내부 고발자들을 위한 시민단체 활동은 언제부터 시작했나?"파면이 취소되고 1995년 지방선거에 출마해 서울시의원이 됐다. 임기 마치고 2000년에 잠시 미국에 머물면서 진로 고민을 했다. 결국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반부패 운동, 공익제보자를 위한 '호루라기를 부는 사람들'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지금은 연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반부패 강연, 대학 강의 등을 병행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