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내란음모정치공작 공안탄압규탄 대책위원회'는 9월 11일 기자회견을 열어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내란음모죄 혐의 등은 “국정원의 정치공작이고, 박근혜 정부식 매카시즘의 초입에 있는 사건”이라며 “국정원 대선개입과 정치공작의 진상을 규명하는 투쟁으로 민주주의를 지켜내겠다”고 선언했다.
진보정치 박경철
형. 여름 지나고 가을도 지났다. 그리고 겨울이 왔어. 8월이었지. 소위 내란음모라는 이름이 붙은 그 사건이 세상을 화들짝 놀라게 했던 것이. 사건이 터지고 형이 하던 당구장 문이 굳게 닫혀 있더라는, 설마 했던 의심들이 구체적인 사실로 드러났지. 수많은 추측들이 사람들 발밑을 굴러 다녔어. 형과 가까웠던 이들은 감옥에 갇히거나 압수수색을 당했고, 그리고 범죄사실의 주요한 인물로 등장했지. 그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졌는데… 나는 계속 그게 묻고 싶었어. "형, 괜찮은 거야?"
그래,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많은 이들에게 형은 '죽일 놈'이 되었어. 그래서 형이 괜찮아서는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정말로 괜찮은지 묻고 싶었어. 사건이 국정원에서 검찰로, 다시 법원으로, 기소되고 재판이 열린다고 할 때, 변호사들에게 물었지. "혹시 형이 증인으로 출석하느냐"고.
출석하지 않겠느냐는 대답들을 하더군. 그때마다 그랬어. 내가 알던 형은 그렇게 마음이 모질거나 단단한 사람이 아닐 텐데… 증인으로 나온다면, 피고인들도 힘든 일이겠지만 본인한테 너무 괴로운 일일 것이라고. 그런 일은 피했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오늘에야 듣게 되었어. 목요일부터 증인으로 법정에 선다는 것을.
불행의 불씨는 언제부터 피어오르는 것일까…. 우리는 예정할 수 없는 인생을 항해하지만 때로 감당할 수 없는 가혹한 바람이 불 때, 피할 수는 없을까. 형을 아는 누군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었어. 세상이 모두 감옥으로 바뀌어버린 사람에게 탈출구가 필요할 테니까. 지금, 형이 있는 곳이 어디라도, 설령 이민을 간다는 어디라도 말이지. 그래서 아주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던 내가 이야기를 꺼내려고 해.
사람들은 의외로 쉽게들 말해. 사건이 터진 것이라고. 어떤 사건. 이번도 그랬지. '내란음모 사건이 터졌어'라고. 일본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두고 "2만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한다면 우리는 피해자의 고통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죽은 2만 개의 사건으로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지. 우리는 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에 주목하지 못하는 시선을 갖게 된 것일까.
형과 함께 보낸 세월이 깨진 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는 나치가 유대인 학살과 관련해 언어 규칙을 만들었다고 하더군. 이 언어 규칙이란 것은 학살이나 유대인 이송과 같은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우회적 표현법을 만들어 대신 사용한 것을 말하는데, 예컨대 학살은 최종 해결책, 완전 소개, 특별 취급 등으로 암호화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킨다는 것이야.
마치 우리 사회에 '내란음모', '종북', '빨갱이' 같은 언어가 사용되면서 현실에 대한 사람들의 감각이 마비돼버린 것처럼. 결국 사람들은 정작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여론 재판대에 먼저 올라, 심판을 받았지. 이미 빨갱이가 되어서 자신들이 살던 마을과 공동체, 직장에서부터 쫓겨나게 되었지. 사건의 진위 여부가 판가름 나기 전에 이미 정상적인 절차나 합리적인 판단이 실종된 곳에서.
그 속에 그들의 가족이 있고 가해자, 조력자, 혹은 프락치라고 불리게 된 형도 있지. 소위 '공안탄압'이라고 불리는 비인격적 언어 뒤에 사람들의 얼굴이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하고 싶었어. 간첩이 산다는 흉흉한 소문의 주인공이 된 가족들은 치료를 거부당하기도 했대. 진보당 당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입길에 올랐고 당신도 RO 조직원이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지.
대학 시절을 함께 보낸 형과 구속된 한동근 형,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함께 지켜보고 집안의 대소사를 같이 나눴던 사람들과의 세월이 깨진 것은 어떻게 할까. 인간의 얼굴을 한, 역사는 모두 어떤 말들로 설명될 수 있을까. 형이 무슨 이유로 지금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고, 국정원이 밝힌 대로 "운동권으로 20여년 살았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라고 했다는 전화가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사람에게는 피치 못할 일이라는 것은 늘 생기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사람은 되지 못해도 괴물은 되지 말자'던 누군가의 말처럼, 막다른 골목까지 형이 내몰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야. 한국사회를 살아온 사람이라면 국정원이라는 곳이 운동권으로 20여년을 살았던 사람이 새로운 삶을 선택하기 위해서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그런 의미에서 국정원의 등장은 끔찍했어. 모든 관계의 파국에 국정원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몸서리쳐지더군. 어떤 사람도 어떠한 정치적 목적으로도 존엄성을 파괴당해서는 안 되는 걸, 그들은 잊고 있는 듯 보이니까.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모두 괜찮았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