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일흔, 그 때 자장면 한 그릇 사줬더라면...

33년 교직생활, 제자들과의 인연

등록 2013.11.21 11:24수정 2013.11.2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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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서울의 한 전시장에서 만난 제자들(왼쪽부터 박진경, 강화선, 필자, 강승모, 김영희, 오영경, 박세진)

서울의 한 전시장에서 만난 제자들(왼쪽부터 박진경, 강화선, 필자, 강승모, 김영희, 오영경, 박세진) ⓒ 박도


나목의 계절


어느새 초겨울이다. 거리의 가로수들도 이제는 거의 벌거벗은 알몸의 나목으로 변하고 있다. 아내는 나에게 60이 지난 뒤부터는 늘 언저리를 정리하라고 권하고 있다. 10년 전 서울에서 강원 산골로 내려오면서 아주 독한 마음을 먹고 언저리를 많이 정리했다. 그동안 꾸역꾸역 가지고 있던 많은 소지품도 몇 차례 이사를 하는 동안 과감히 정리했다.

a  오산중 제자 진천규(전 한겨레 사진기자) 군과 LA 한 공원에서(2004. 3.)

오산중 제자 진천규(전 한겨레 사진기자) 군과 LA 한 공원에서(2004. 3.) ⓒ 박도

삶의 공간이 서울 도심에서 강원도 외딴 산골마을로 갑자기 변하자, 자연 그동안 연을 맺은 사람들과도 점차 거리가 멀어졌다. 거자일소(去者日疎), 곧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점점 사이가 멀어진다는 옛 말이 명언이었다.

간혹 서울 사는 친구나 친지들이 구연을 들먹이며 만나기를 희망하여 상봉하지만 다시 산골로 돌아올 때는 매번 거리감을 느낀다. 그들이 무심코 뱉는 말들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친구들은 네가 사는 곳에 땅 좀 사줄 수 없느냐고, 내가 강원 산골로 내려온 것을 부동산 투기 삼아 내려온 줄 알고 있다.

나는 이실직고로 강원도에 내려와 땅 한 평 산 일이 없고, 내가 사는 안흥 집도 거저 얻어 산다고 하면 그들은 도무지 믿어주지 않았다. 그런 이들과 무슨 이야기 상대가 되겠는가. 천하에 얘기꺼리가 없어 늘어놓는 모교 자랑이나 제 자랑, 자식 자랑에 아파트 값, 외제 자동차나 골프 얘기는 나의 관심 밖이다.


사제의 인연

그동안 서울에서 고교, 대학생활과 교직생활 등으로 50년이 넘게 맺은 구연들은 자연 하나하나 지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지울 수 없는 인연은 교단에서 맺은 사제 인연이다. 나는 그들이 부르거나 내가 사는 고장으로 찾아올 때만은 가능한 거절치 않고 만난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에게 숱한 말빚을 졌기 때문이다. 좀 더 고상하게 말하면, 어쩌면 사람과 사람의 인연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것은 사제관계일 것이다. 이 사제관계로 인류의 문명과 역사는 발전해 왔다.


a  내가 사는 고장으로 찾아온 이대부고 제자 이종호(좌), 강승모(중) 군, 그리고 필자(강원도 횡성 자작나무숲 미술관, 2012. 6.)

내가 사는 고장으로 찾아온 이대부고 제자 이종호(좌), 강승모(중) 군, 그리고 필자(강원도 횡성 자작나무숲 미술관, 2012. 6.) ⓒ 박도


나는 이제 곧 일흔이 되는데, 지난 인생 가운데 가장 잘 한 일은 내가 교사가 되어 33년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일이고, 가장 잘못한 일은 교단에서 학생들에게 좀 더 실력 있는 교사, 좀 더 많은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는 교사, 가난하고 공부가 좀 더 뒤진 학생들을 더 넓은 가슴으로 껴안는 교사가 되지 못한 점이다.

1973학년도에 내 반에 후암동의 한 고아원에서 다니는 이 아무개 학생이 있었다. 나는 그 학생을 담임한 일 년 중 내 집에 불러다가 밥 한 끼 대접치 못한 게 매우 부끄럽다. 그때는 미혼이기에 그랬다고 변명할 수도 있을 테지만 학교에서 가까운 중국집에 데려가 그 시절 걔네가 가장 좋아하는 자장면이라도 한 그릇 사주지 못한 점은 정말 잘못했다.

그 다음해, 중3 졸업반을 담임했을 때 장 아무개 학생은 등록금 미납으로 장기 결석을 하여 끝내 제적처리했다. 나는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내가 싫어진다. 솔직히 그때 부자 학부모에게 그만한 촌지는 받았으면서도. 그 뒤로도 내 반에 휠체어로 움직이는 박 아무개 학생이 있었지만 한 번도 그 휠체어를 밀며 화장실에 데려다준 적도 없었다. 나는 참 인정이 없고 감정이 메마른 교사였다

a  미국 뉴욕에서 강원 산골로 찾아온 신민철(우) 군과 함께 고순영(중), 신유철(좌) 군(강원 횡성 자작나무 숲 미술관, 2013. 6.)

미국 뉴욕에서 강원 산골로 찾아온 신민철(우) 군과 함께 고순영(중), 신유철(좌) 군(강원 횡성 자작나무 숲 미술관, 2013. 6.) ⓒ 박도


'성공한 인생'

내가 다시 교단에 선다면 늘 열심히 공부하는 실력 있는 교사, 학생을 편애하지 않는 교사, 몸과 마음이 아픈 학생을 어루만지는 교사가 되고 싶지만, 이미 다 끝나버린,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교단에서 학생들과 헤어질 때 "진정한 사제관계는 졸업 후다"는 말을 자주했는데, 그 말 탓인지 학교를 떠난 뒤 국내는 물론 세계 곳곳에서 여러 제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사랑과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나의 작품세계를 넓히도록 일본여행을 알선해 준 제자가 있었는가 하면, 미주대륙 횡단을 동행하자는 제자도 있었다. "화장실이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영어도 할 줄 모르는 구닥다리 골동품 훈장을 허드슨 강변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만찬을 베풀고는 맨해튼 관광을 안내한 제자, 로스앤젤레스 구석구석을, 워싱턴 곳곳을 안내한 제자도 있었다. 그들 덕분에 나는 서른 권이 넘는 책을 쓸 수 있었다. 이즈음도 나는 그들의 알뜰한 자료제공으로 <어떤 약속>이라는 장편소설을 연재하고 있다.

a  일본기행 중 아오모리 현 한 얼음집에서 제자 김자경(우) 양과 함께(2003. 2.)

일본기행 중 아오모리 현 한 얼음집에서 제자 김자경(우) 양과 함께(2003. 2.) ⓒ 박도


나는 지난 주중에 고교를 졸업한지 30년이 넘은 제자들의 초대를 받아 오랜만에 서울로 갔다. 그새 그들은 쉰이 넘어 이미 대학생을 둔 학부모가 되었다. 그날 모임에서 이런저런 학창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하다가 '성공한 인생'에 대한 좌충우돌의 난상토론이 있었다. 한 제자가 '이혼하지 않고 사는 부부'라고 결론을 내리자, 합석한 다른 제자들은 대체로 그 말에 수긍했다. 그만큼 가정문제,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힘든 현실인가 보다.

그날 늦은 저녁, 청량리 역에서 원주행 막차를 탔다. 차창에 비친 내 초라한 몰골을 바라보면서, 그래도 지난 내 칠십 평생이 '성공한 인생'이라고 하니 이즈음 움츠려졌던 마음이 다소 펴진다. 나는 집에 도착한 뒤 곧장 아내에게 '성공한 인생'에 대한 감사의 말을 했다.

이즈음은 그저 평범하게 살기도 어려운 세상인가 보다.

a  LA 레몬드 바닷가에서 오산고 제자 박정헌 군과 함께(2004. 3.)

LA 레몬드 바닷가에서 오산고 제자 박정헌 군과 함께(2004. 3.) ⓒ 박도


#성공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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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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