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는 세상에 대처하는 시인의 처세법

[영원한 자유를 꿈꾼 불온시인 김수영 65] <백지에서부터>

등록 2013.12.01 20:31수정 2013.12.01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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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종이가 옥색으로 노란 하드롱지(hard rolled paper; 가벼운 포장지나 봉투 따위에 쓰이는 종이-기자 주)가
이 세상에는 없는 빛으로 변할 만큼 밝다
시간이 나비모양으로 이 줄에서 저 줄로
춤을 추고
그 사이로
4월의 햇빛이 떨어졌다
이런 때면 매년 이맘때쯤 듣는
병아리 우는 소리와
그의 원수인 쥐 소리를 혼동한다

어깨를 아프게 하는 것은
노후(老朽)의 미덕은 시간이 아니다
내가 나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개울과 개울 사이에
하얀 모래를 골라 비둘기가 내려앉듯
시간이 내려앉는다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두통의 미덕은 시간이 아니다
내가 나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바다와 바다 사이에
지금의 3월의 구름이 내려앉듯
진실이 내려앉는다

하얀 종이가 분홍으로 분홍 하늘이
녹색으로 또 다른 색으로 변할 만큼 밝다
―그러나 혼색(混色)은 흑색이라는 걸 경고해 준 것은
소학교 때 선생님······
(1962. 3. 18)

세상이 거꾸로 흘러갈 때가 있다. 지난 시절 어느 노래 가사에서처럼, 잠수함이 하늘을 날고, 털장갑 장사꾼이 한여름에 '장갑 사려'를 외친다. 상식이 비상식이 되고, 거짓이 진실 행세를 한다. 부정 선거를 질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종북'으로 모는 지금 세상이 그렇지 않을까.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의 수족을 묶는 이 나라의 권력자들이 그렇지 않을까.

<백지에서부터>는 거꾸로 된 세상에 관한 시다. 시 속의 세상은 밝다. 그런데 그 밝음이 수상쩍다. 너무나도 밝아서 "이 세상에는 없는 빛으로 변"(1연 2행)할 것 같다. 비현실적인 밝음이다. 밝음이 밝음이 아니라 어둠의 왜곡처럼 보이는 이유다. 겉으론 밝지만 실제로는 시커먼 세상인 까닭이다.

그 세상에서 화자는 "병아리 우는 소리와 그의 원수인 쥐 소리를 혼동"(1연 8, 9행)한다. "내가 나를 잊어버"(2연 3행)리는 괴기스러운 일도 벌어진다. 덕분에 '시간'은 하릴없이 흘러가고, '진실'은 손이 닿을 수 없는 저 먼 곳에서 어른거리기만 한다. 혼란과 착오와 왜곡이 넘쳐난다. 진실은 땅에 묻히고 세상에는 거짓이 넘쳐난다.


시인 김수영이 말하고 싶었던 건 무엇일까. '하얀 종이'가 '분홍'이 되고, '분홍 하늘'이 '녹색'으로 변하는 건 밝고 아름답다. 문제는 혼색. 화자는 지금 "4월의 햇빛이 떨어"(1연 6행)지는 늦은 오후 한때를 지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눈에 노을속의 화려한 색깔들이 비친다. 하양과 분홍, 녹색 등이 어우러졌다. 화려하기 짝이 없다.

그때 문득 "혼색은 흑색이라는 걸 경고해 준 / 소학교 때 선생님"(4연 3, 4행)의 말이 떠오른다. 하양과 분홍, 녹색 등이 어우러진 밝음이 곧 어둠이라는 것. 이때 수영의 머릿속에는 이런 말이 떠오르고 있지 않았을까. 세상의 상식을 믿지 말라. 진실의 탈을 쓴 거짓과, 거짓으로 매도되는 진실을 구별하라.


그렇다면 이 시는 그런 '혼색'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수영의 몸부림이지 않을까. '혼색', 곧 '흑색'으로부터 벗어나 순연한 '백지'의 진실을 찾으려는 수영의 외침이자 다짐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한 어절로 된 제목 뒤에 다음과 같은 서술어를 넣어 다시 읽는다.

새로 시작하자

혁명의 열기가 사라진 지 2년이 가까워지는 시점이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 군부 체제는 통제와 억압의 시스템을 차근차근 챙겨가고 있었다. 그런 좌절과 절망의 시기를, 수영은 그만의 특유의 수단으로 극복하려 하고 있었다. '백지'로 상징되는 순수와 원칙을 통해서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백지에서부터>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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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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