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사진들주중에 지방에서 일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사진을 만들어 벽에 걸었다
이영미
일을 하는데 장문의 문자메시지가 왔다. 80세가 넘은 그녀의 엄마이다. 스마트폰으로 철자 하나 안 틀린 긴 글이다. 좋은 전시를 함께 딸과 해주어서 참 고맙고 앞으로도 축복이 내리길 기도하겠고 더불어 큰 발전을 하라는 요지이다. 문득 전시 오프닝 날 그녀와 그녀의 엄마가 만든 풍경 하나가 생각난다.
"엄마! 영미 언니하고 비교하지 말아주세요. 언니는 언니고 나는 나예요. 사람마다 다른 것처럼 장애인도 그렇다니까요!"전시장에서 인천에서 사범대학원을 나와 교직에서 30년간 몸담고 있는 작가동생이 팔순의 어머니에게 말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주중에 모두들 대구와 인천과 청주에서 일하다가 주말이면 만나서 작가와의 만남의 날을 정해 지인들과 미술에 관심있는 사람들과 만나며 2주간의 일정을 가지고 펼쳤던 '침묵의 기쁨전'이 드디어 종료되었다. 문득 선명히 기억나는 것이 있다.
30대와 40대 50대의 침묵의 여성 4명! 작게는 20여년 길게는 40여년 동안 붓을 잡은 우리들이다. 키가 작은 이도 있고 큰 이도 있고, 보기 드문 미인도 있고 나처럼 그냥 눈빛 하나만 살아서 김구 손녀같은 둥근 안경낀 사람도 있다. 말을 좀 잘하는 사람, 아예 말을 못하는 사람, 말을 못해도 수화를 잘 하는 사람, 수화를 못 해도 나처럼 말을 좀 하는 사람 다양하다.
오십 보 백보 차이지만 우리는 서로 서로 그런 잘하는 것은 더 나누고 모자란 것은 보듬어 주면서 20년 간 우정을 다져왔다. 그러나 우리들의 가족들을 서로 서로 만난 것은 이번 기쁨의 침묵전 만남의 날이었다. 그녀들은 내 딸들을 보았고 나는 그녀들의 엄마와 지인들을 보았다.
팔순의 어머니에게 그녀는 하나 뿐인 딸이다. 그래서 그 시대에 아주 드물게 사범대학교에도 보내고 그녀는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가 인천미술대상을 받았을때 그녀의 어머니는 무척 기뻤을 것이다. 돌아가신 우리 친정엄마처럼! 그러나 그녀의 엄마는 전시를 기획하고 주관한 나를 만나고 나서 그녀에게 말했다.
"너는 왜 영미선생님처럼 말을 잘 못하니? "
그녀는 상처를 받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반 짜증조로 엄마에게 비교하지 말라고 그 자리에서 말을 했다. 아마 숱하게 엄마에게 그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다. 세상 모든 어머니에게 자식은 한 없이 모자라면서도 애틋하고 그러면서도 좀 더 잘 되기를 바라는 그런 존재인 모양이다.
함께 인사동에서 게스트하우스 호텔을 잡아 긴 밤을 같이 지새울때 그녀는 그런 어머니의 기대를 이해하지만 이해하고 가만히 있으니깐 점점 심해져서 힘든다고 하였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 인식을 아무리 바꾸려고 해도 바꾸어지지 않는다면서.... 나는 말했다.
"바꾸려고 하거나 또는 엄마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말을 하면 할 수록 엄마는 아쉬워하고 더 고집스러워가실꺼야! 그러니 그냥 알았어 그런데 잘 안돼! 이렇게 하면 엄마는 점점 더 수그러질 가능성이 있으니 일일이 대꾸하고 잘못이라고 말을 안하는 게 좋겟어!"
전시 마지막 날! 그녀는 황금구두를 신고 왔다. 그리고 우리 보는데서 혼자 텔레비젼을 보고 따라 익힌 탭댄스를 추었다. 칠보공예를 익힌 솜씨로 예쁜 브로우치와 직접 만든 비누와 화장품도 나눠주었다. 참 재주가 많은 그녀이다. 말을 좀 유창하게 하는 것과 스스로 만들어 주변과 예쁘게 나눌 줄 아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소중한 일일까 그녀의 엄마가 생각을 해 보면 좋겠다.
대구에서 온 동생들은 따스한 쉐타와 와인을 나눠주고, 나는 동행이란 캘리가 들어간 앞치마를 나누었다. 얼마나 따스한 마음들인지 나는 참 행복했다. 그리고 그녀들도 마찬가지 였다. 전시는 참 소담하면서도 기쁘고 맑게 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