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직원에 끌려가는 이석기 의원내란음모 혐의를 받고 있는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지난해 9월 4일 오후 국회의원회관에 있던 이 의원이 국정원의 구인영장 집행에 응하고 있다.
남소연
나는 키케로가 카틸리나 음모를 분쇄하는 과정을 보면서 세기의 재판이라고 불리는 '이석기 내란음모사건'을 떠올린다. 만일 키케로가 카틸리나 음모 대신 '이석기 음모'를 발견했다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보수우익의 첨병이었던 키케로가 지금 이 땅에 나타나 이 사건을 본다면 어떤 판단을 내렸을까, 과연 그가 이 사건을 내란음모로 단정하고 법정에서 엄벌을 구하는 열변을 토했을까.
내가 보기에는 그러지는 못했으리라 판단한다. 그는 적어도 법률가였고, 그것도 이성의 힘을 믿는 자연법의 옹호자였다. 그런 그가 이석기의 '음모'를 카틸리나의 그것과 동일시했을 리는 없다.
무릇 한 국가의 전복을 목표로 하는 내란음모죄는 이른바 위험범이다. 위험범은 어떤 법익(법으로 보호하는 이익)을 현실적으로 침해하지 않아도 위험이 있다는 그것만으로 처벌할 수 있는 범죄다. 따라서 위험범은 속성상 처벌자의 자의(恣意)가 개입될 수 있는 범죄유형이라 그 처벌에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죄의 성립요건을 미리 법률에 규정하여 처벌해야 한다는 헌법원칙인 죄형법정주의는 자칫 파산을 맞이할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위험이 있을 때 그것을 범죄로 처벌하는 것이 용인될까. 그것은 그 음모의 실현가능성 및 명백현존성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 음모가 사실이라 할지라도, 실현가능성이 없으면 그것은 처벌할 수 없는 불능범에 해당하고,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이 없다면 그것은 반체제인사들의 공상적 토론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나는 이석기의 사상이나 그의 행위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사실 딴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다. 만일 그가 어떤 모임에서 혐의사실과 같은 말을 해서 사람들을 선동했다면 내겐 일고의 가치도 인정할 수 없는 말이다. 나는 그저 이 땅에 돈키호테 한 명이 나타나 사람들을 웃겼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건전한 상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일 사람은 결코 없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행동을 내란음모죄로 처벌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내란음모는 대한민국을 전복하기 위한 음모로 이 나라의 안위에 심각한 위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국가 대역 범죄다. 카틸리나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원로원 의원과 키케로를 살해하고 로마를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에겐 동조자 수천 명이 있었으며 외세인 에트루리아와도 연계되었었다. 그러니 그의 음모는 누가 보아도 실현가능했으며, 목전의 위험도 있었다. 만일 그것을 막지 않았다면 여지없이 로마는 뒤집어졌을 것이다.
'이석기 음모'는 어떤가. 그와 몇몇 사람들이 어느 회합에서 이야기했다는 것이 모두 사실로 드러난다고 해도 그것을 카틸리나의 음모와 비교할 수 있을까. 법률가 이전에 평범한 시민으로서, 또한 역사의 교훈을 중시하는 사람으로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다. 만고의 웅변가 키케로가 지금 환생하여 국정원, 그리고 검찰을 대신하여 이석기를 탄핵한들 이 사건을 카틸리나 음모로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키케로에게서 법의 기원, 자연법을 배운다키케로를 이야기하면서 그의 자연법 사상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난 김에 법의 기원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보자. 법은 우리를 강제한다. 법은 우리에게 금(禁)하고 명(命)한다. 법은 때론 우리의 자유를 억압한다. 그러니 법은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나에겐 거추장스런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법이 없는 세상을 생각할 수 없다. 법은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한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말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말이다. 법의 존재를 부정하고서는 하루도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의문을 품는다. 나에게 주어진 이 법을 꼭 지켜야 하는가. 내가 이 법에 굴복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이 법이 정당한 법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법이 정당하지 못할 때 사회는 위태롭다. 항상 그 법을 위반하는 사람이 나타나며 그런 법은 언젠가는 생명력을 다해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다면 법은 어떤 경우에 정당하다고 할 것인가, 그 정당성의 근거는 무엇일까.
옛날부터 이런 논쟁은 수없이 존재한다. 인간사회의 범주에서 구할 때는 그 근거를 절대적인 왕에게서 구하기도 했다. 왕의 명령은 신성한 것이니 그것은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인권이 신장되면서 법의 근거는 국가 공동체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인민에서 찾았다. 민주국가에서 법이 정당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인민의 뜻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루소는 이를 인민의 일반의지(general will)라고 말했다.
이것을 좀 더 설명해 보자. 민주국가에서는 다수 인민의 뜻이 법으로 나타나면 그것은 정당성이 있는 법이라고 한다. 국민의 뜻은 평상시 대의기관인 국회가 대신하니 국회가 법률을 만들면 그것이 곧 정당성 있는 법이 된다. 국민은 국가를 만들면서 가장 중요한 기본법을 만든다. 그것이 헌법이다. 헌법은 모든 법의 상위법으로 하위법의 정당성의 근거가 된다. 모든 하위법은 헌법의 이념에 맞아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인민(국민)의 뜻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인민의 뜻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국회가 국민의 뜻을 대신하는 곳이라고 하지만 그 기관을 움직이는 것 역시 사람이다. 그 사람은 언제든지 국민을 배반할 수 있으니 국회는 자칫 국민의 뜻을 왜곡하는 기관이 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나치즘이나 파시즘도 대부분 국회라는 대의기관의 법률을 통해 전체주의를 만들었다. 그 경우에도 그 법이 우리가 지켜야 할 정당한 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법의 정당성의 근거를 오로지 국민 혹은 인민의 뜻이라고 하는 것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법은 국민의 뜻 이상이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인류 지성이 발견한 바로는 그것이 바로 자연법이다.
이 자연법 사상은 역사가 길다. 이 사상은 절대 왕정에서 벗어나면서 근대시민국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성행한 법이론이지만 시민사회와 관계가 없었던 고대에도 많은 지성인들에게 각광받던 이론이었다. 그 체제가 왕정이든 공화정이든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법률의 근본적 출발은 자연본성에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본성은 신과도 연결되니 법은 인간사를 떠나 신의 본성으로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이 글의 주인공 키케로는 2천 년 전에 이에 대한 생각을 명확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