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인 김준한(41) 신부
김종술
"루카 복음서 마리아의 노래 중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루카 1, 52)라는 말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로마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의 심정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목소리를 빌려 표현한 성경 구절입니다. 밀양 어르신 중 어떤 분은 지금 상황이 일제 시대보다 더하다고 말합니다. 무기 만든다고 놋그릇과 수저를 거둬갔던 일제도 전 재산을 홀랑 빼앗아 가는 한전보다는 나았다는 겁니다. 불의한 권력 행사는 결국 그 끝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상식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천주교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부위원장 김준한(41) 신부가 밀양 송전탑을 강행하는 박근혜 정부와 정책 담당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그는 할매 할배들에게 '웃는 신부'로 각인되어 있다. 그의 미소는 삭막한 밀양 전쟁터에서 어르신들에게 많은 위안을 준다. 2013년의 마지막 날인 지난 12월 31일 부산가톨릭센터에서 그를 만났다.
다음은 김준한 신부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어르신들 의지로 여기까지 왔다"- 송전탑에 맞서 싸우는 할매 할배들에게 신년 메시지를 주신다면? "어르신들, 참 긴 시간 애 많이 쓰셨습니다. 이 싸움은 외부의 연대나 정치권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온 게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의 도움과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좀 더 우울하고 절망적인 상황들이 또 닥칠지 모르지만, 처음을 기억하며 다시 노력하면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서로 격려하면서 마지막에 웃을 수 있도록 할매 할배들이 힘냈으면 좋겠습니다."
- 할매 할배들은 거의 매일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성서를 인용해서 말씀을 해주신다면. "어르신들 가운데 천주교 신자는 거의 없습니다. 신부로서 이 자리에 기꺼이 함께 했지만, 어르신들이 보여주신 모습 자체가 예수님이 가르친 복음의 내용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복음 9장 23절)라는 말씀을 몸소 실천한 어르신들이야말로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가 합니다.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이 길을 지치지 않고 따랐다는 의미에서 이 성경 말씀에 누구보다 충실했던 사람은 할매 할배라고 생각합니다."
- 지금 할매 할배들의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정말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했을 때 새로운 국면이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지금 어둠이 좀 깁니다. 이 정도의 싸움이 될 거라고 예측했지만 지금은 예상 외로 (밝은) 국면이 안 보입니다. 아마 그런 부분에서 어르신들이 힘들어 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 고통을 겪으면서도 어르신들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는데요. 송전탑 반대 싸움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나요? "어르신들이 빨리 싸움을 끝내고 자유롭게 농사 짓던 시절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찾아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르신들에게는 돌아갈 과거가 없습니다. 이미 이 싸움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당신들의 생각들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송전탑 반대 싸움을 하면서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이 만들어졌습니다. 송전탑 반대 싸움이 당신들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단순히 송전탑만 막는 게 아니라, 불의한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들을 하십니다. '내가 이 싸움에서 지더라도 포기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 송전탑 반대 싸움은 무엇과 무엇의 대결인가요? "'정의로운 에너지' 앞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솔직할 수 있을까? 이 싸움의 국면은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불의한 에너지'에 기초한 삶을 영유하는 걸 부끄러워할 용기가 있는가. 정의로운 에너지를 선택하기 위해 내가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는가. 누구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는데요. 모든 당사자의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치자를 왕좌에서 끌어내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