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준 "곤혹스럽지만 국회 결정 존중"지난해 12월 31일 오전 국회 국정원개혁특위에 출석한 남재준 국정원장은 국정원 개혁법안이 채택된 데 대해 "정보활동에 대한 법적 규제에 곤혹스러움을 금치 못하지만, 이번 국회 결정을 존중하며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오른쪽은 김관진 국방부 장관.
남소연
북한이 국정원을 얼마나 두려워 하는지는 알 턱이 없지만,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국정원을 무서워 하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제 몸 속에 서식하고 있는 암 덩어리를 무서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외려 이상한 일일 터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볼 때 국정원은 암적인 존재가 아니라 암 덩어리 그 자체다.
국정원이 중앙정보부 이래 안전기획부를 거쳐 오면서 얼마나 많은 '진짜 간첩'들을 잡았는지 그 역시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정권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죄 없는 시민들을 잡아다가 두들겨 패고 감옥살이 시키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이 박정희의 '중정'과 전두환의 '안기부'의 역사이기도 하다. 일상적인 정치사찰은 물론 여당 중진 의원들까지 말 안 듣는다고 잡아다가 콧수염 잡아 뜯고 반병신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민주주의의 암 덩어리 중정-안기부-국정원가장 심각한 것은 민주정부 10년을 제외하고, 역대 선거 때마다 빠지지 않고 '미친 존재감'을 과시해 왔다는 거다.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지키고자 만든 조직이 알고 보니 자유민주주의체제 자체를 잡아먹는 괴물이었던 거다. 선거를 거치면 거칠수록 힘이 세지더니 이제는 아무도 손댈 수 없는 불가사리가 됐다.
이런 암 덩어리를 지닌 환자가 우여곡절 끝에 병원에 왔는데 진단도 제대로 하지 않고-제대로 진단했다면 틀림없이 완전히 도려내야 한다는 처방이 나왔을 터-진통제와 소화제 몇 알 내주곤 치료 끝났다고 손 털면 되겠는가. 해 넘기기 직전 여야가 국회에서 합의했다는 국정원 개혁안이 영락없는 그 꼴이다.
국정원 개혁 소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혹은 선거가 끝날 때마다 나오지 않은 적이 없다. 1992년 14대 총선이 끝나고도 그랬다. 김영삼이 낀 3당 합당으로 김대중의 호남을 고립 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수서택지 특별분양, 대통령 정치자금, 보안사 및 안기부의 정치사찰 등의 문제로 민심 이반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민자당은 총선에서 이겨 위기를 탈출하고 싶었고 그 해 말 벌어질 대통령선거에서 기선을 제압하고 싶었다.
온갖 부정선거가 다 기획됐다. 민자당으로부터 돈을 받고 유세장마다 대학생들을 동원한 '한맥청년회', 9사단 현역 중위 이지문의 폭로로 밝혀진 군 부재자투표의 광범위한 부정실태, 총선이 끝난 후 연기군수 한준수의 양심선언으로 드러난 관권 선거. 그 어느 것도 안기부의 방조, 묵인 혹은 조율 없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안기부는 그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직접 나서서 뛴다는 게 그만 동티가 나고 말았다.
부정선거 백화점 1992년 14대 총선 주인공은 안기부선거를 사흘 앞둔 3월 21일 새벽 0시 30분. 서울 강남구 개포동 일대에서 안기부 직원 4명이 야당 후보의 여성 편력을 써 갈긴 흑색선전물을 뿌리다가 야당 선거운동원에게 붙잡힌 것이다. 붙잡힌 이들은 도청기, 무전기, 정치권 인사 이름과 차량 번호 등이 적힌 수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안기부 대공수사단 소속으로 밝혀졌지만, 안기부는 "이들이 안기부 직원인 것은 맞지만, 이들의 부정선거 활동이 안기부와는 무관하다"고 시침을 뗐다.
2012년 국정원 직원 김하영의 오피스텔 활약이 발각됐을 때 기시감이 들었던 이유다. 기술이 발달한 덕분에 유인물이 인터넷을 이용한 SNS로 바뀌었을 뿐, 정보기관의 대북담당자들이 선거에 개입해 아무도 모르게 야당후보에 대한 흑색선전을 만들어 유포하고, 그것을 개인 일탈행위로 치부하는 것은 판박이로 닮았다.
다른 것은 2012년과 달리 1992년에는 집권 여당이 참패한 것이다. 다수당을 유지하긴 했지만 선거 전 의석수 218석에서 무려 69석을 잃고 과반에도 미달했다. 이기려고 기획한 부정선거가 들통 나는 바람에 오히려 결정적인 패인이 됐다. 김용판 같은 적극적인 경찰 협조자가 어떻게 해 볼 도리도 없이 워낙 빨리 신분이 발각됐기 때문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선거가 끝난 뒤 1주일도 채 안 돼 서동권 안기부장을 경질해 버렸다.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선거에는 지고 정권에 부담만 준 책임을 물었다는 것이 맞는 해석일 것이다. 붙잡힌 안기부원들에 대한 이후 처리가 그 증거다.
안기부원 중 주범격인 한아무개는 "평소 신세를 많이 진 친구의 부탁을 받고 유인물을 뿌렸다"는 주장을 재판 내내 굽히지 않았다. 친구의 신원이나 인쇄소의 이름 등에 대해서도 "친구와의 의리 때문에 밝힐 수 없다"고 잡아뗐다. 다른 직원들이야 단순히 상사인 한아무개의 지시에 따라 범행에 가담했을 뿐인 것이 됐다.
결국, 이들은 구속된 지 두 달 만에 모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주범 한아무개는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 나머지 3명은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씩을 각각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안기부 대공수사관으로서 그동안 음지에서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왔으며, 선거에서 사필귀정의 국민심판이 내려졌고, 유죄판결을 받으면 공무원직이 박탈돼 사실상의 처벌을 받게 되는 점 등을 참작, 집행유예를 선고한다"고 했다.
안기부의 힘이 그 정도였다. 당시 검찰로 하여금 오히려 "피의자들이 심경변화를 일으켜 (진실을) 불면 어떡하나"고 걱정하게 하고, 재판부로 하여금 중벌을 때려야 할 이유를 솜방망이 판결의 이유로 갖다 붙이게 겁박할 수 있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국정원이라고 덜 할까. '이명박근혜'를 거치면서 힘이 더 세졌다. 검찰총장을 찍어내고 수사팀장을 징계할 정도 아닌가.
이번에 여야가 합의한, 정치관여 시 형량을 현행 '5년 이하의 징역과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서 '7년 이하의 징역과 7년 이하의 자격정지'로 형량을 강화하고 공소시효 기간도 10년으로 연장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몇 배로 강화한들 무슨 효과를 거둘 수 있겠나. 정해 놓기만 하고 집행할 힘이 없는데...
안기부보다 힘이 센 국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