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봉이 쓴 도산서원 현판도 진품은 도산서원이 아니라 유교문화박물관에 있다.
이대용
"도산서원 글씨는 한석봉이 썼습니다. 퇴계 선생께서 돌아가시고 5년 뒤 제자들이 도산서당을 서원으로 승격시키는데 선조 임금이 한석봉을 불러 글씨를 쓰게 했습니다. 왼쪽 맨 끝 글자인 '원(院)'자를 쓰게 하고, 서(書), 산(山), 도(陶) 순서로 쓰게 했죠. 한석봉은 그제서야 퇴계를 모신 서원의 현판을 자신이 쓰게 된 것을 알고 놀랍니다. 이 때문에 현판의 좌우방이 기울었고 '도(陶)' 자의 갈고리(阝)가 떨렸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옵니다."유교박물관 2~4층 전시실은 <소학>(小學)과 <대학>(大學) 등에 나오는 유교이론을 바탕으로 구성돼 있다. 조선 후기 화가 강세황이 그린 도산서원도는 실경산수화다. 훼손되기 전 4대강의 본모습을 사진이 보여주듯 안동댐으로 수몰된 지역이 그림으로 남아있다. 현재 도산서원 들어가는 길에서 시사단(試士壇)을 볼 수 있는데 그림에는 비어있다. 시사단은 그림이 그려진 이후 세워졌기 때문이다. 시사단은 노론이 집권하면서 벼슬길에서 멀어졌던 영남 남인들을 등용하기 위해 치른 도산별과를 기념하는 비각이다.
박물관 한쪽에는 한국유학의 학맥도가 전시돼있다. 그림에는 실학자 이름도 나눠져 있는데, 성리학과 실학이 실천방향은 다르지만 한국유학의 맥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지역적으로 퇴계∙남명학파를 영남학파, 화담∙율곡∙우계학파를 기호학파라 부른다.
남녀평등의 가족제도조선시대 가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대가족제도에서 가족이 많으면 재산 분배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따라서 지금의 유언장처럼 재산을 분배하는 문서인 분재기를 남겨 상속 순위와 몫을 정했다. 분재기는 부모가 죽기 전 직접 재산을 분배한 분깃문서와 부모가 죽은 뒤 형제들이 모여 합의로 재산을 분배한 화회문기(和會文記)로 나뉜다.
박물관에 전시된 권심처손씨분깃문기는 권심의 처 손씨가 자식 4남매와 장손 그리고 첩의 딸에게 노비를 나눠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4남매에게 비슷한 수의 노비를 나눠주는 등 조선 전기까지는 남녀 균분상속이 관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안도형제화회문기는 퇴계의 손자 5명이 재산을 나눠가진 것으로 조선 전기와 달리 장자인 이안도가 가장 많은 상속을 받은 것이 특징이다. 이때부터 아들, 특히 장자가 중요해지고 조선 후기로 갈수록 장자 상속분이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