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직으로 세 번의 직장을 거치고, 3년이 채 안 되는 결혼 생활 동안 집을 네 번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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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 배달을 하며 살자니. 가슴이 답답했다. 이 남자랑 헤어지기는 싫은데. 이 남자랑 계속 같이 있으려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오래 여행도 다니며 '정말로' 그렇게 살아야 할 것 같았다. 충동적이고 이상주의적인 나는 주위 친구들에 비한다면 안정된 삶을 추구하는 편도 아니었다. 그래도 이 남자는 좀 심했다. 나는 헛갈리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삶은, 안정인가 자유인가.
아무리 헛갈려도, 삶은 계속된다. 나는 이 남자와 헤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결혼까지 했다. 계약직으로 세 번의 직장을 거치고, 3년이 채 안 되는 결혼 생활 동안 집을 네 번 옮겼다. 안정되지 못한 삶에 남편을 원망한 적은 없다. 남편 탓은 아니었다. 선택은 내 의지였다. 이런 삶이 싫었다면, 애초에 이 남자와 결혼도 안 했을 것이다. 견디지 못했다면, 결혼 생활도 삐걱대다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 어느샌가 나는, 어렸을 때부터 떠돌며 살아온 남편의 생활 방식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워낙 변덕이 심하고 즉흥적인 성격이라, 한 가지 길을 정해서 오랜 시간을 비슷비슷하게 살아가는 것도 나에겐 답답한 인생일 것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정착하지 않은 삶이기에 먼 미래를 계획할 수 없었다. 무턱대고 가구를 사들일 수도 없었다. 고양이도 키울 수 없었다. 그리고 아주 가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나를 엄습했다.
불안감이 엄습해올 때면 나는 인터넷을 뒤졌다. 공부해 보고 싶었던 전공의 학교 정보도 찾아보고, 미국인과 결혼해 미국에서 사는 한국 사람들이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도 뒤져봤다. 구인 구직 사이트에 접속해 이제와 새삼 나의 적성을 고민하며 직업 카테고리를 뒤져보기도 하고, 대학 졸업반 때는 시큰둥했던 대기업의 정규직 구인 공고를 유심히 읽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변덕이 심하고 이상주의적인 나는, 나의 이상에 부합하는 직업을 찾지 않는 이상 한 직장에서, 한 곳에서 정착해 살지는 못할 것이다. 많은 시간과 돈과 다른 기회를 투자했기에 쉽게 버릴 수 없는, 그 안정된 삶을 벗어나지 못해 불행해 할 것이다.
하지만 철이 없는 난, 그런 삶이 조금 두렵다 내가 이렇게 갈팡질팡하고 있는 사이, 주위의 친구들은 하나 둘 결혼을 하고 안정을 찾았다. 결혼한 친구들은 대출을 받거나 부모님께 도움을 받아 전세를 구했다. 친구의 아파트는 환하고 깨끗했다. 새 가구 냄새가 신혼 분위기를 한층 돋우는 듯했다. 가구는 오랫동안 정착해 사는 데 필요한 짐들로 가득 채워졌다. 먼 미래를 계획해 놓은 신혼부부의 집은, 손님인 내가 가서 느끼기에도 아늑하고 편안했다.
그 사이 우리 부부는 긴 여행에서 돌아왔다. 한국과 내 삶은 더 혼란스러워져 있었다. 다시 계약직으로 직장을 구했다. 통장의 잔액은 두 번째 직장을 나왔을 때와 비슷했다. 전세는커녕 웬만한 월셋집의 보증금을 내기에도 빠듯한 돈이었다. 뉴스는 실업률이 치솟고, 집값은 오르지 않는다며, 10년 전부터 해왔던 말을 똑같이 반복했다. 가계 빚이 곧 1000조 원을 돌파할 것이라고 했다.
가계 빚 1000조 원. 그게 얼마라는 건지. 얼마인지 짐작도 안 가는 숫자를 보며, 나는 그 숫자 뒤에 얽매인 삶을 생각했다. 우리 부모님의 삶과 비슷한 것일 테다. 전세를 얻기 위해 대출을 받고, 자영업을 하기 위해 대출을 받고. 운영이 잘 안 되는 자영업의 손실을 메꾸느라 또 대출을 받고, 자라나는 자식들의 학비를 대느라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고. 우리 부모님은 아마, 내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안정이냐 자유냐' 같은 배부른 소리 같은 건 생각해 보지도, 들어 보지도 못했을 거다.
그렇게 살아오신 부모님 덕분에, 나에겐 선택의 자유가 있다. 지금부터라도 주위 사람들처럼 대출을 받아 전세를 얻어 정착된 삶을 살 수도 있다. 안정적인 직장과 수입으로 원금과 이자를 조금씩 갚아 나가며, 그 사이 차도 사고, 아이 학교도 보내고, 사교육 욕심도 부려보고, 가끔 명품이라는 것도 사보고, 그냥 다리미 대신 스팀다리미 사는 사치도 부려보고, 그렇게 살 수 있다.
하지만 철이 없는 난, 그런 삶이 조금 두렵다. 안정의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빚의 굴레가 두렵다. 빚이 있다는 건, 어떻게 해서든 그걸 갚아야 끝이 난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돈을 벌고 빚 구멍을 메워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지옥 같은 직장이라도 그만둘 수 없고, 그 빚을 털어버리기 전에는 새롭게 시작할 수 없다. 즉, 자유가 없다.
당분간 우리의 선택은 안정이 아닌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