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좌)와 지승호(우)대담중인 책의 두 저자, 강신주와 지승호
조우인
얼마나 오랜만이던가, 이토록 가슴을 울리는 책을 읽은 것은. '경제학자' 라는 꿈을 가지게 된 이래, 나는 중학교 때 틈만 나면 읽었던 인문학 도서를 사실상 끊은채 경제,경영 서적을 읽는 데에 나의 독서 시간들을 투자했다. 처음에는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한 권 한 권 책을 읽어 나갈 때 마다 계속해서 늘어나는 지식과, 더욱 깊어지는 경제적 상황들에 대한 해석 능력은 나를 충만한 만족감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런데, 1년이지나고 2년이 거의 다 지날 때 쯤 되자, 어느 순간 부터 나는 갑자기 '허무감' 에 빠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내가 지금 이 책들을 왜 읽고 있는 거지?' 라는.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것은 내가 처한 상황, 즉 입시를 1년 가량 밖에 남겨두지 않은, 다시말해 완연한 성인으로서 독립체가 되기 까지 고작 365일이 조금 더 남았을 뿐인 나의 현실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절대 그런 고민할 일 없을거야. 진로가 분명하잖아!' 그런 다짐은, 막상 '새로운 삶' 을 위한 시간이 1년 앞으로 다가오자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라는 미래에 대한 고민. 그러한 고민이 서서히 나의 사고 전체를 휘감기 시작했던 것이다. 본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고방식을 가진 나는, 금세 그런 생각 속에 파묻혀 어느샌가 훨씬 더 미래, 즉 '죽음' 을 걱정하기 시작해 버렸었다. '아무리 내가 많은 것을 이루고 많은 것을 배워도, 나는 언젠가 죽는다. 사라진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열심히 살 필요가 있나? 특별한 사람이 될 필요가 있나? 그저 하고싶은 것만 하고 소시민으로 살다 죽어도 되지 않나? 아니, 난 죽음 자체가 두려운데, 어떻해야 하지?'
그렇다. '죽음' 에 대한, '막연한 미래' 에 대한 두려움. 나는 이미 다 극복했다고 믿었던 사춘기의 심적 방황이 다시금 나를 덥쳐온 것이다. 부모님에게 상담해 보기도 했고, 스스로 인터넷을 뒤지며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와 그들에게 조언해 주는 글들을 찾아 읽기도 했다. 허나 아무리 그래도 공허는 채워지지 않았다. 불안감은 극복되지 않았다. 자연스레, 내가 하던 모든 일들, 특히 경제 관련 도서를 읽는 일들이 시간낭비 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이 책을 언제, 어떻게 사게 되었는지, 솔직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책을 그러한 상황 속에서 집어 들게 되었던 것은, 내 인생에 있어 몇번을 생각해 보아도 너무나 큰 행운임이 분명하다. 오랫동안 집어들지 않았던 인문학 서적에 대한 호기심으로 집어든 것이었지만, 나는 책장 하나하나를 넘길 때 마다 놀라움과 감동, 그리고 말 그대로 '몸이 떨리는' 심적 울림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고민을, 나의 모든 고통을 이 책이 마주해 주었다.
"삶은 일단 아프다고 봐야 해요. 행복한 것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하는 것이 정답이라고요. (중략) 우리는 지나치게 행복주의에 경도돼 있어요. 사회가 좋아지든 나빠지든 간에 인간은 고통스러운 거예요. 오버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다 행복한 줄 알아요. 다 힘든데도 버티면서 사는 건데."온갖 번민 속에서 책을 집어든 나는, 책을 읽은지 얼마 되지 않아 나오는 이 문구를 보고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눈물이 흘렀다. 혹자는 위의 말이 너무 잔인한 것이 아니냐고, 힘든 현대인들에게 위로는 못해줄 망정 무슨 소리냐고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위의 글이, 그 어느 사탕발린 말들보다도, 따듯함을 걸친 위로보다도 더 큰 힘으로 다가왔다. 빛으로 느껴졌다. 스스로 나의 삶을 다시금 일으켜 새우기 위한 의지를 가질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다, 모든 이들이 삶의 번민을 짊어지고 그래도 살아간다. 나는 위의 말을 읽으며, 마치 누군가가 나의 옆에 서서 나를 일으켜 주며 격려해 주는 듯한 느낌을 온 몸으로 받았다.
"삶이 그렇게 아프고 힘든 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려고 자꾸 연어처럼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에요. 힘들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방향을 선택하면 강물에 휩쓸려 가는 건데, 그건 살아도 죽은 거죠. (중략) 눈 감을 때 안식을 찾으려면 지느러미질을 엄청스레 해야 해요. 그러면 죽을 때 편안해져요. 죽음이 안 무섭다고요. 그렇게 살아야 해요. 자신이 가려는 방향으로 관철해가려고 해야 해요.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려면 더럽게 힘들죠. (중략) 저항에 부딪힐 때 항상 고맙게 여기고 '내가 살아 있나 보다' 이렇게 생각해야죠.'그렇다. 내가 원하던 것은 이러한 말이었다. 몇번이나 위의 글을 반복해 읽으며 절실히 가지게 된 생각이다. TV에, 라디오에, 수많은 '인문학' 딱지를 달고 나온 서적들에 범람하는 어줍잖은 '힐링' 이 아닌, 진정으로 '나' 가 '나' 로서 살아갈 수 있게, '당당해 질 수 있게' 해 주는 조언. '맨얼굴' 을 통해 세상을 마주보아도 두렵지 않을 수 있게, 그 두려움을 긍정할 수 있게,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조언. 나는 비로서 가슴이 뻥 뚫린 듯한 느낌을, 새로운 시간을 마주한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강신주는 이 책에서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각 주제별로 그의 번뜩이는 날카로운 통찰력이 빛났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중에서도 우리의, 즉 인간의 '삶' 에 대해서 논하는 부분이 매우 크게 다가왔다. 강신주는 이어서 말했다. 우리는 각각 '고유명사' 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누군가를 따라하는 삶이 아닌,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삶이 아닌, 각자 다른 자신들만의 중심을 가진 삶을 살아야 한다고.
그는 그렇기에 김수영이라는 시인을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그가 평생을 작품을 통해 말해왔던 것이 인간 개별인 고유의 주체성, 독자성이기에. 이 글의 맨 위에 언급한 시구 역시 강신주가 책을 통해 인용한 김수영의 <달나라의 장난> 이라는 작품의 일부이다. 강신주는 말한다. "김수영의 글을 보면 최소한 발버둥이라도 쳐야 한다고 하는 절절함이 있어요. (중략) 어쨌든 자유로부터 출발해야 하거든요. 자유로운 사람만이 삶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단 말이에요. (중략) 위대한 인문학자와 사상가가 나오는 조건 역시 그 사람의 당당함이에요. 포로수용소에서 김수영만이 그랬던 것 처럼. 그 덕목을 제고하기 위해 제가 강연을 많이 하는 것이기도 해요. 중학생, 고등학생들을 만나고 그래요. '너희들, 자유롭냐? 자유로워서 고통스러웠냐?' 그렇게 다 쏟아놓고 와요. 직구 승부를 하는 거에요."
처음 이 책을 펼 때 내 머릿속에는 삶에 대한 회의적인 의문과 무의미한 공허, 고통 뿐이었다. 하지만 책을 덮으면서, 100% 그럴 수 있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의 삶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 정도 떨쳐낼 수 있었다. 나의 삶을 마주할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등한시해 왔던 인문학적 가치의 실질적 소중함을 다시금 깊숙히 느낄 수 있기도 했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같은 저자의 <김수영을 위하여>도 읽어볼 생각이다. 그의 책을 읽으며, 삶의 당당함을 노래했다는 김수영이 나 역시 좋아지기 시작했으니. 왠지 그 책을 읽으면, 지금보다도 더 성숙해진 모습으로 나의 삶에 맨얼굴로 다가설 수, 당당하게 말을 걸 수 있을 것만 같다. 정작 저자 본인은 '그것 역시 삶의 주체성을 훼손 시키는 하나' 라며 강력히 비판했지만, 어쩔 수 없다, 아직 내가 그 말을 몸과 마음으로 수용하기에는 성숙하지 못한 것 같으니 - 강신주, 당신은 저를 다시금 일어나게 해주었습니다, 제 삶의, 유년의 '멘토' 는 당신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반드시 훗날 스스로에게 자신있게 된 모습이 된 채 당신을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당신 덕분에, 나는 스스로 도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고. '조우인' 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하나의 고유명사로 존재할 수 있도록 자신하는 삶을 가지게 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