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끝나지 않은 동백림 사건'편에 출연한 임석진씨가 당시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다.
MBC 화면갈무리 캡쳐
친구는 '박정희 대통령, 김종필 공화당의장, 김형욱 정보부장 중 한 명과 연결해주겠다'고 제안한다. 임석진은 마침내 1967년 5월 17일 오후 3시,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과 독대한다.
천 교수는 당시 중앙정보부 김형욱의 "가장 철저하고 돌쇠 같았던" 반공 공작을 떠올렸을 때, 이것이 굉장히 지혜로운 결정이었다고 평가한다. 임석진은 "함정의 틈바구니에 끼어버린 사람들 모두가 살 수 있는 방안"을 구하기 위해, 대통령과 2시간 넘는 대면에서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지만 그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는다.
중앙정보부는 특별수사대를 꾸려 프랑스와 독일의 유학생들을 납치해 온다. TV에 나서기를 좋아했던 김형욱은 이들 명단을 직접 <대한뉴스>에서 발표했다. 임석진은 "대통령이 뒤에 있어서" 직장도 잃지 않았고, 당시 간첩이 당해야 했던 불법 감금과 온갖 고문을 면할 수 있었다.
반면 그의 실토로 잡혀온 이응노 화백, 윤희상 작곡가 등 유학생 동창들은 '간첩혐의'를 쓰고 폭압을 당했다. 당시 잡혀온 사람들 가운데 독일 시민권자도 있었다. 독일 정부는 이 일로 남한과 국교를 단절하려고까지 했다. 임석진은 극히 '운 좋게도' 홀로 살아 나온 셈이다.
암울한 시대 지식인의 '웅얼거림'"남북 대결이 만든 희한한 일이죠. 북한에 어쩌다 두 번 가게 됐고 당시 관례였던 입당원서를 썼지만 북이 맘에 안 들었고. 그럼에도 임석진은 독일 철학의 대가로 살면서 외국에도 못 나가고 평생을 학문세계 안에서만 살았어요. 현실에서 발을 빼고요."
1979년에 와서야 비로소 해외여행이 가능해졌을 정도로 그의 삶은 지속적인 통제를 받았다. 12년 간 독일 등 외국 학계와 교류하는 것조차 일절 불가능했다. 그러던 그가 박정희가 죽던 무렵부터 작게나마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운영하던 학술지 <헤겔철학>에 실리는 편집자 서문 등을 빌려 학문의 영역과 현재 한국이 처한 현실의 연관성을 여러 차례, 그러나 '잘 들리지 않게' 발언했다.
칠순 노인 갈릴레이가 종신형을 선고받은 법정에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며 중얼거렸던 것처럼 임석진은 '말하지 못하는 입'으로 계속 뭔가를 말해왔던 것이다. 당시 '간첩'이 되지 않고 살아남은 상당수 다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침묵'으로 삶을 지켜냈다. 학문과 예술이 가진 '가치중립'의 힘에 기대어 침묵해온 스스로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진 채였지만 '연명'할 수는 있었다.
지식인의 살기 위한 전향, 그러나 역시 사형'통혁당(통일혁명당) 사건' 역시 1960년대 대한민국 사회를 엄청나게 흔들어 놓았던 최대 간첩사건이다. 남북한의 분단 현실 속에서 지식인들이 품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은 '통혁당 사건'을 촉발했지만 결국 158명이 검거되고 50명의 구속자를 내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성공회대 신영복 선생, 한명숙 전 국무총리 남편 박성준 선생. 서울대 사회대 관계자들이 많이 잡혀갔어요. 사건 주모자 가운데 하나였던 김질락도 삼촌인 김종태의 권유로 북한을 왕래하다가 68년 중앙정보부에 발각돼 감옥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옥중에서 전향서를 씁니다."김질락은 옥살이 중 젊은 처와 어린 딸이 보고 싶어 긴 단행본 분량의 전향서를 쓴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온 엘리트였지만, '살기 위해서' 자신이 믿던 모든 생각을 부정하고 반공주의자로 돌아선 것이다. 그러나 김질락의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박정희 정부는 7.4남북공동성명 직후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다.
"검사님, 이제 연극 그만하시죠"사형장에 가는 순간까지 '검사님, 이제 연극 그만하시죠'라고 말했을 만큼 사형 집행을 믿을 수 없었던 '전향 간첩' 이수근도 있었다. 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이었던 그의 탈출 사건 전말은 1967년 영화 <고발>로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