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 우리가 가자면 가는 수밖에 없소이다

[무협소설 무위도(無爲刀) 11] 유언(6)

등록 2014.01.29 11:47수정 2014.02.03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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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도 無爲刀
무위도無爲刀황인규

상대가 은화사 소속이라는 걸 밝히자 연 장문인과 무림맹의 온철빈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예를 갖추면서도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자고로 비밀기관이란 그 은밀함이 풍기는 위협은 둘째치고서라도, 황궁의 감시와 표적이 된 것 같아 내심 불안감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귀협들의 직책과 존함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무림맹의 온철빈이 그까잇 목패 하나 가지고 순순해질 수는 없다는 투로 물었다. 그러나 사내들은 아무 대꾸가 없었다. 다시 팽팽한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두 사내가 서로 마주보더니 순식간에 눈빛이 교환되었다. 이윽고 장검을 멘 사내가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죄송하오이다. 저희 은화사에 대해 상세히 말씀 드릴 수 없는 사정 이해 바라오. 정 알고 싶으시면 예전에 강호에 떠돌던 시절의 별호로 인사를 대신하겠소이다."

장검을 멘 사내가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

"본인은 과거 곤륜흑우(崑崙黑牛) 라고 불리웠소이다."
"아니? 그럼 곤륜파 삼우 중 하나라는 사동화 대협?"

온철빈이 놀라듯 말했다. 곤륜파는 변방에 있는 탓에 강호에 그다지 관여하진 않지만 그들의 무공만큼은 구대문파 중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렵기로 소문이 나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림이나 무당, 화산 등 다른 중원의 문파들은 제자들의 진출이 활발하고, 출현이 잦은 만큼 무공도 그만큼 노출돼 있다. 그러나 곤륜파는 지리적 거리만큼이나 무공도 은폐돼 있고 그 뿌리도 약간 달라 정파 중에서 유일하게 변칙으로 알려져 있는 문파이다.


"과거의 인연일 뿐입니다."

짧게 답을 한 사동화는 두 개의 도를 차고 얼굴이 대춧빛처럼 붉은 사내를 가리켰다.


"이분은 과거 섬서괴도(陝西怪刀)라는 별호로 강호를 주유하셨습니다."

이번에는 모두가 가벼운 탄성을 질렀다.

"섬서괴도라면? 섬서지방을 쌍도로 평정했던 척숭(戚崇) 대협 아니시오?"

온철빈이 다시 한번 놀라듯 말을 했다.

"이런, 내가 대협의 쌍도를 보았을 때 익히 알아봤어야 했는데, 본좌의 무명을 용서하시오."

연 장문인도 거들었다. 그러나 척숭은 여전히 말이 없다. 그저 무덤덤한 표정으로 장문인과 눈을 마주쳤다. 자신은 볼 일만 볼 터이니 자질구레한 격식은 차리지 않겠다는 무언의 항의 같았다.

섬서괴도 척숭은 섬서 지역 흑도 무리의 수괴였다. 장안은 과거 천자가 거했던 도읍답게 천하의 문물이 모여드는 도회이다. 그래서 유명 방회(幇會)와 사파의 세력들이 자주 세력 다툼을 벌이곤 한다. 장안이라는 거대 도읍을 품고 있는 섬서에서 흑도의 수괴 자리 하나를 차지했다면 그의 무공의 깊이는 소림의 십대제자나 무당의 팔대호법 혹은 청성의 사대천왕과 대등하거나 웃길로 볼 수 있다.

그런 정도 실력인 그가 칠팔년 전부터 강호에서 소리 소문없이 사라졌다. 소림과 무당 고수들의 협공으로 무공이 폐해졌다거나, 당대 최고의 사파로 인정받고 있는 현무회의 영입 제안을 거절하자 그들의 암습에 의해 쓰러졌다거나, 혹은 비천문 이후 최고의 문파로 회자되고 있는 비사문(飛嗣門) 문주와의 대결에서 패하고 나서 은퇴했다거나 혹은 이도저도 아닌 괴질로 사망하였다는 등 강호에 떠도는 소문은 막북(漠(北)의 모래바람처럼 자욱하였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확인되지 않은 채 풍문으로만 떠돌았다. 그런 그가 은화사에 있을 줄이야.

"일운상인은 어떻게 되셨소?"

곤륜흑우 사동화가 물었다. 말투는 어느 새 힐문조가 되었다.

"조금 전에 운명하셨습니다."

장문인이 대답했다.

"그가 남긴 말은 없소이까?"
"달리, 중요한 말은 없었습니다."

장문인이 대답하며 관조운을 돌아보았다.

"저도 딱히 중요한 말을 들은 건 없습니다."

관조운은 스승의 유지를 따르기로 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스승의 마지막을 발설하진 않을 것이다.

"그럼 마지막까지 곁을 지킨 사람은 어느 분입니까?"

섬서괴도 척숭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내공의 깊이가 절로 우러나는지 목소리가 억실억실 공기를 진동시키고 있다.

"소생이올시다."

관조운이 척숭을 향해 말했다.

"그렇다면, 소협이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네에?"

관조운이 반문하며 장문인을 쳐다보자, 연 장문인이 한 걸음 앞에 나섰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 모르겠으나, 여기는 저희 비영문의 영내이고 이 공자 역시 한때는 비영문의 제자였으니 저희와 아주 상관이 없다곤 할 수 없습니다. 우선 저에게라도 사유를 밝혀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장문인이 목소리에 최대한 예우를 갖춰서 말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사내의 대답은 싸늘했다.

"아니 되오. 우리가 가자면 가는 수밖에 없소이다."

그러더니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면서 허리에 찬 도 하나를 스르렁, 뺐다. 날이 넓은 파풍도(坡風刀)다. 날에서 뻗친 음산한 기운이 실내를 압도한다.

연 장문인은 상대가 이렇듯 오만하게 나오자, 주인 된 입장에서 가만있자니 비영문의 체면이 서지 않고 그렇다고 상대가 황궁 소속이니 섣불리 거부할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무림맹의 온철빈과 요명은 제삼자의 입장이라 나설 처지가 아니었지만 사태를 바라보는 눈길만큼은 당사자 못지않게 진지했다.

모두가 어쩡쩡한 상태로 정적이 흘렀다. 관조운이 짧은 정적을 깨뜨리고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관조운은 장문인이 자기 때문에 곤란한 입장에 처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스승님의 장례를 치러야 하는 뒷일도 일이지만, 무엇보다 비영문이 은화사라는 황궁 조직에게 시빗거리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사실 스승님이 운명하는 순간 곁을 지킨 건 자신 밖에 없지 않았는가.

관조운이 순순히 승낙하며 앞에 나오자 사동화가 다가와 관조운의 좌우 견정혈을 짚었다. 어깨에서 지르르, 회오리바람이 요동쳤다. 관조운이 팔을 움직이려 했으나 혈이 막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대춧빛 얼굴의 척숭이 도를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럼 이만."

척숭이 장문인을 향해 포권을 하고 돌아섰다. 그 뒤를 사동화가 관조운의 한쪽 팔을 잡고 뒤따랐다.

비영문의 안채와 연무장 사이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다. 나무는 가지가 곧고 잎이 무성해 그 형태만으로도 사람들의 어여쁨을 받지만 무엇보다도 300년이라는 긴 세월을 비바람 속에서 견뎌낸 생명력 때문에 세인들의 추앙을 받기도 한다. 긴 수령에 걸맞게 나무는 높이가 이십여 장에 이르고 둘레는 어른 십 여 명이 팔을 한껏 벌려야 겨우 맞잡을 굵기다.

비영문이 한창 세를 넓힐 때 전각을 짓느라 다른 나무들은 다 베어내도 느티나무만큼은 손대지 않은 것은 이 나무가 비영문을 보호하는 수호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무의 잎들은 너무 무성해 한낮에도 줄기가 보이지 않았고, 가지는 사방으로 뻗쳐 밑에서 보면 층층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지금 그 나무 깊은 곳에 커다란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는 사내가 있다. 그는 검은색의 옷을 입고 등허리에는 협봉도를 사선으로 찔러넣었다.

비영문의 안채에서 무사 차림의 두 사내와 서생 차림의 한 사내가 나왔다. 무사 차림 사내 중 한 명은 앞에 서고 나머지 한 명은 서생 차림 사내의 팔을 잡고 뒤따르고 있다. 나무 위의 사내는 이들을 놓치지 않고 그들의 걸음걸음마다 시선을 쫓아가고 있다. 마침내 그가 슬며시 미소를 짓자, 구렛나루에서 목까지 이어지는 가느다란 흉터가 잎새를 파고든 햇살 속에서 반짝 빛났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실뱀 같았다.
덧붙이는 글 # 미리 보는 다음 회

은화사 단원이 강호의 고수들로 구성돼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자기 혼자 그 둘을 처리하는 게 그다지 어렵진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노출이 돼 있고 자신은 어둠 속에 있다.
이건 무공의 높낮이를 떠나 상황을 지배하느냐 지배당하느냐 하는 조건 속으로 그들을 떠미는 것이다.
그는 목표물을 앞에 두고 상황을 지배하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1월 31일(금)은 설날인 관계로 연재를 쉽니다.
#무위도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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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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