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아현 고가도로가 생길 당시 신촌 , 대현동 방면의 주변 풍경.
서대문구청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서울의 20세기는 고가도로의 전성기였다. 도심 외곽에서 도심으로 진입하는 주요 통로마다 고가도로가 건설됐다. 유동 인구와 물류가 증가하는 양적 성장의 시대에 고가도로는 근대화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아현고가도로 이후 서울에는 101개의 고가도로가 건설됐다.
당시 경제성장의 동력은 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하는 옷, 신발, 가발 공장과 같은 경공업이었다. 도시에는 공장이 들어서고 일자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사람들도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몰리기 시작했다. 도시집중화 현상이 빠르게 일어났다. 사람이 몰리는 만큼 차도 늘어났다. 경기가 활성화되면서 물류 이동도 급격히 증가했다. 하지만 당시 서울의 도로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교통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갑자기 늘어난 차량들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도로를 늘려야 했다. 그 방법으로 고가도로가 선택된 거다.
"도로 위 공중에 939m짜리 4차로 길, 내일을 딛는 거보(巨步), 논스톱으로 달리는 자동차 행렬이 장관" "거추장스런 땅 위를 피해 높다란 공간을 짚어 터놓은 고가도로가 지상도로에 도전장을 낸 것" 이 거창한 표현들은 아현고가도로 준공 당시 신문기사의 내용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가차도에 대한 놀라움과 기대감을 잘 나타낸다.
이렇게 당시 서울 시민들에게 고가도로 건설은 다소 충격이었다고 한다. 도로 위에 다리를 놓는다는 걸 상상도 못하던 시절, 언덕배기 동네 아현동에 고가도로를 만든다니까 이해를 못했다고. 기자의 생각에도 '차가 많아지면 도로의 차선을 더 늘리면 되지 왜 굳이 힘들게 도로 위에 다리를 지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8일 아현고가도로 걷기 행사 중 만난 장년층의 아저씨들 가운데 머리가 희끗한 한 분이 기자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1960년부터 시작된 근대화, 고속 성장의 과정에서 당시 우리 사회에는 '빨리 빨리'가 최고의 덕목이었다. 신호도 없이 정체도 없이 그대로 쭉 '논스톱(Non-Stop)'으로 달릴 수 있는 고가도로가 당시의 시대상과 맞아 떨어진 거다.
'사랑의 다리'가 된, 추억의 느림보 고가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