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약속극장 내부 홍보 포스터. 당당하게 상영중.
이정혁
둘째, 영화를 보는 동안 <또 하나의 가족>을 울부짖는 그들의 '또 하나의 가증'을 알게 되면서 심기가 몹시 불편해진다. 검은 양복을 입은 자들로 표현되는,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그네들의 역겨운 사고방식이 스크린 전체를 관통하여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은 불편함, 그 이상이다. 인간성이 결여된, 생명을 그저 쓰고 버리는 부품 쯤으로 생각하는 그 기업의 정서에 분노가 치민다. 순간적으로 주머니에서 그 회사 로고가 박힌 스마트 폰을 꺼내 두동강 내고 싶은 충동이 수차례 든다.
셋째, 그 동안의 무관심에 대한 미안함과 죄의식이 불편하다. 영화를 보지 못했다면, 평생 모르고 지나갔을수도 있었다. 아니 일부 언론을 통해서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일상의 밥벌이를 핑계로 관심밖으로 말어내고 만 것이다. 영화 속 가슴 아픈 진실은 양심을 파헤치고, 이기를 벌주기에 가슴이 찢기는 듯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내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 더더욱 불편해진다. 지금껏 뭐하고 살았던가?
넷째, 영화 속 공룡기업을 욕하면서도, 그 회사의 제품과 영향력에 길들여진 내 자신의 무력감이 불편하다. 내가 사는 공단 도시도 소위 그 회사의 월급으로 먹고 산다는 지역이다. 회사의 사원증과 사원복은 그 자체로 벼슬이다. 상인들은 회사에 소문 날까 두려워 싫은 내색조차 하지 못한다. 회사가 이전할지 모른다는 풍문은 정치와도 맞물려 자질조차 없는 자들을 선거에 당선되게 만든다. 공룡의 그늘 아래놓인 힘없는 자들이 이 영화를 보고도 그 어떤 저항조차 하지못할 현실이 너무도 불편하다.
<또 하나의 약속>은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불편한 영화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면서도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연대와 협력의 손길은 고사하고,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틀림없이 불편한 영화이다. 하지만, 그러한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꼭 봐야만 하는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