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수영. 이미지는 민음사에서 나온 <김수영전집>에 실린 것임을 밝힙니다.
민음사
제목에 대한 시비는 이쯤에서 멈추자. 수영 자신의 입을 빌리면, 이 시는 생명과 생명의 대치를 다룬다. 일대일의 대결의식이 시상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가계 수입으로 벌어지는 정기적인 소동을 통해 생명에 대한 뜨거운 의지를 그린 <만용에게>도 이 작품과 같은 계열의 작품이다. 그는 두 작품에서 드러나는 주제어인 '대결'을 "나의 본질에 속하는 것 같고 시의 본질에 속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대결의 두 주체는 화자 '나'와 '어린 놈'이다. 수영이 쓴 시작 노트에는 '어린 놈'의 정체가 드러나 있다. 꼬마는 수영의 집으로 공부하러 오는 이웃집 아이였다. 아이는 자기 집이 시끄럽다고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수영의 집에 와서 공부하다가 가곤 했다. 아내 현경과 사업 관계로 맺어진 한 친구의 조카뻘 되는 아이였다.
어느 날, 수영은 <잔인의 초>의 초고 일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1행 "한번 잔인해봐라"에 머물러 있었다. 그 이상으로는 눈길이 가지 않았다. 이 작품의 최초 초고 중 말살된 부분에 있는 "잔인도 절망처럼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 작품으로부터 40여 일 전쯤에 쓰인 <절망>의 마지막 행,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과 거의 같았다. 흡사한 이미지가 서로 다른 두 작품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절망>에서도 그렇지만 <잔인의 초>에서도 수영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자신을 죽임으로써 진정한 생명의 경지를 얻고 싶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최초 초고에 썼던 예의 구절은 그렇지 못했다. 시상이 막혀 버렸다. 고민스러웠다.
"죽음의 총성"으로 시작된 시... 어떤 사정이 있었기에 바로 그때 예의 이웃집 아이가 수영의 집에 왔다. 아이는 수영에게 인사를 하고, 제법 콧노래도 흥얼거리면서 즐거워했다. 고민 속에서 시상을 구상하던 수영에게는 "난도질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은 '대결'이라는 주제 구축을 위한 시상으로 얼마나 안성맞춤인가. 수영은 "지옥에서 천사를 만난 것처럼 일사천리로 써갈겼다". 약간의 막힘과 망설임이 없지 않았으나, '생명'(12행)과 '죽어라'(14행)의 대치가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바로 직전의 시에 쓰인 이미지로 시작되었기에-기자 말). "죽음의 총성과 스타트한 시"가 돼 버렸던 작품이 구원을 받게된 것이다. 이웃집 아이가 없었다면 <잔인의 초>는 이 세상에 나오지 못한 채 영영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대결'을 위한 화자의 의지는 '잔인의 초'에 응축돼 있다. 그 의지의 불꽃은, "한번 잔인해 봐라"(1행)에서 발화한 후 "초가 쳐 있다 잔인의 초가"(10행)라고 반복되는 구절에서 크게 폭발했다가 "요놈― 요 어린 놈"(11행) 이하 "에미 없는 놈"(12행)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나도 나다― 잔인이다"(13행)를 지나 '죽어라'(14행)에 이르면 대결의 의지는 죽음을 불사하는 경지까지 다다른다. 수영이 '대결'을 "나의 본질"이자 "시의 본질"로 규정한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수영에게 <잔인의 초>는, "나의 가장 아끼는 작품도 아니고 가장 자신 있는 작품도 아니"다. 하지만 스스로 "가장 불안한 작품도 아니"라고 말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잔인의 초>는 그의 시 창작 역사에서 적지 않은 전기를 마련한 작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영에게 이 작품은 마냥 성공작인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는 이 작품에서의 유일한 성공은 리얼리즘의 색깔과 공리성으로부터 상당히 멀어졌다는 데 있다고 자평했다. 이 작품 이전까지 수영은 시가 리얼리즘과 공리성을 담아야 한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는 이 작품을 계기로 그런 "불안의 책임"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그것을 극복하고 일어설 단계에 와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잔인의 초>를, '생명 대결'의 진경을 보여주는 대표작 <풀>의 이미지가 그 희미한 모습을 보여주는 최초의 작품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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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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