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 기륭전자 사무실 한 켠에 자리잡은 송경동 시인.
권우성
길거리 시인다운 답변이다. 송 시인에게 자작시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보라고 했더니, 시집 <사소한 물음에 답함>에 수록된 '무허가'를 꼽았다. 용산 철거민 현장에서 쓴 시란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대추리에서, 기륭 고공농성장에서 무단으로 텐트 치고 살아온 시간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8년여 동안 무허가 인생이었다"고 말했다. 즉석에서 시낭송을 부탁했다. 아래 동영상을 클릭하면 그의 시낭송을 감상하실 수 있다.
[자작시 낭송]
http://www.youtube.com/watch?v=7sJlKAE_fTQ
무허가용산4가 철거민 참사 현장점거해 들어온 빈집 구석에서 시를 쓴다생각해보니 작년에는 가리봉동 기륭전자 앞노상 컨테이너에서 무단으로 살았다구로역 CC카메라탑을 점거하고광장에서 불법 텐트 생활을 하기도 했다국회의사당을 두 번이나 점거해퇴거 불응으로 끌려나오기도 했다전엔 대추리 빈집을 털어 살기도 했지허가받을 수 없는 인생그런 내 삶처럼내 시도 영영 무허가였으면 좋겠다누구나 들어와 살 수 있는이 세상 전체가무허가였으면 좋겠다 시 낭송을 다 듣고 "법정 스님의 무소유 아류처럼 보인다"고 우스개로 말하니, 그는 또 웃는다.
야반도주한 사장출소한 뒤 지난 2년여 동안 전북 남원 귀정사에 사회연대 쉼터인 인드라망을 만들면서 자신도 좀 쉬기도 했던 그가 다시 기륭전자에서 무허가 인생을 시작했다. 여성 조합원과 송 시인이 농성장을 차린 건 지난해 12월 30일 기륭전자(현 렉스엘이앤지) 최동렬 회장이 야반도주하면서부터다. 일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황당한 사연을 이야기하자면 2005년 7월 5일 기륭전자 여성 조합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 때로 돌아가야 한다. 핵심만 요약하면 이렇다.
당시 기륭전자 여성 노동자들이 받은 월급은 최저임금보다 10원이 더 많은 64만1850원이었다. 이들은 '문자 해고' '잡담 해고'에 맞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투쟁했다. 노동부와 검찰도 불법 파견이라고 판정했지만, 불법파견에 대한 고용보장이 법조항에 없었기 때문에 대법원에서도 패소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파견법 철폐와 불법 파견 정규직화를 내걸고 1895일 동안 싸웠고, 결국 2010년 11월 1일 국회에서 공식 합의가 이뤄졌다. 정규직으로의 복귀가 현실화된 것이다. 단, 여성노동자들은 국내 생산라인이 없다는 이유로 유예기간을 거쳐 2013년 5월 2일부터 출근을 했다.
하지만 사측은 이후 9개월 동안 업무 배치는 물론 임금도 지급하지 않다가 12월 30일 몰래 본사이전을 했다. 그날 오전 여성 노동자들이 출근했을 때에는 대부분의 사무 집기가 빠진 상태였다. 이날부터 조합원들은 철야 농성에 돌입했고, 송 시인도 며칠 뒤에 결합했다.
눈물의 숫자기자가 농성장을 찾아간 날 현관에는 붉은 색 숫자가 붙어 있었다.
'농성 50일째'.3년여 전, 1895일에서 멈췄던 '눈물의 숫자'가 처음부터 다시 돌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시작된 싸움. 노조원들의 입장에서는 기막힌 일이지만, 최 회장은 시간을 벌면서 많은 것을 챙겼다. 그는 우선 사회적 협약인 조인식 때문에 법적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2008년 중국의 생산시설을 비롯해 가산동 공장부지를 매각했던 그는 2012년에는 기륭 소주공장과 신대방동 신사옥까지 매각했다. 현재 기륭전자에는 생산시설을 비롯해 고정자산이 없는 상태다.
"분노스럽죠. 국회 귀빈식당에서 정치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조인식을 가졌는데, 사측에 의해서 휴지조각이 된 거잖아요. 기륭 여성 노동자들이 근 7년을 싸우고 버티고, 사회 각계의 연대를 통해 직접 고용 전문직화라는 약속 하나를 받아낸 거거든요. 한국사회 비정규직 현실에서 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기뻐했는데, 이렇게 다시 농성장을 꾸리고 싸워야 한다는 현실이 참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