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기념관에 전시된 김종서 동상.
김종성
하지만, 계유정난 이전만 해도 수양대군의 정권 장악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수양대군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제3당의 영수였다. 문종이 김종서에게 어린 단종을 맡기고 세상을 떠난 뒤에 정계는 김종서 중심으로 재편됐다. 김종서 쪽이 제1당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안평대군 세력이 제2당을 형성했다. 세종 임금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은 둘째인 수양대군보다 서열은 낮았지만, 인물로 보나 세력으로 보나 수양대군보다 한 수 위였다.
안평대군이 수양대군보다 강력했다는 점은 단종 1년 3월 21일자(양력 1453년 4월 29일 자) <단종실록>에서도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안평대군은 세상의 의심을 살 정도로 세력규합에 보통 이상의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한편, 수양대군은 상대적으로 소외된 편이었다.
안평대군이 훨씬 더 강력했다는 사실은 후세 사람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수양대군이 안평대군을 꺾은 지 200년 가까이 된 17세기에도 안평대군의 정치력을 높게 평가하는 문학작품이 나왔을 정도다. 그 작품은 바로 <운영전>이다.
<운영전>은 안평대군 사저에서 근무하던 운영이라는 궁녀의 비참한 최후를 다룬 작품이다. 궁녀는 왕궁뿐만 아니라 왕족의 사저에서도 근무했다. 안평대군의 사저에는 수많은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그중 하나가 김 진사라는 미소년 선비였다. 운영은 김 진사와 은밀한 사랑을 나누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안평대군의 정치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김 진사가 안평대군의 사저에 들어왔고, 김 진사가 이곳에 들어왔기 때문에 운영이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안평대군의 정치력이 운영의 죽음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셈이다.
수양대군이 승리한 지 200년이 지난 뒤에도 안평대군의 정치력을 반영하는 문학작품이 나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안평대군이 그만큼 강력한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은 유교국가였다. 유교국가는 유교를 연구하는 선비들이 국가를 운영하는 나라다. 선비들이 국가를 경영하려면, 주상과 세자를 제외한 왕족은 국정에 나서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조선의 선비들은 이전 시대의 선비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태도로 왕족의 정치 참여를 견제했다. 그런데도 단종 시대에는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라는 두 왕족이 한꺼번에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단종이 어린 왕이라서 그랬던 걸까? 아니다. 왕족은 원칙상 정치에 간여할 수 없다는 금기를 깨고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이 각각 제2당 및 제3당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단종의 할아버지인 세종 때문이었다.
세종은 세자인 문종을 돕게 할 목적으로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에게 국정 참여의 기회를 제공했다.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은 형제들을 살육하고 정권을 잡은 사람이다. 하지만 세종은 자기의 친형이자 원래의 왕위계승권자인 양녕대군과도 잘 지냈다.
자기 자신이 형제애가 좋아서인지 세종은 문종·수양대군·안평대군 형제도 사이가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두 왕자가 국정에 참여해서 세자인 문종을 돕도록 했던 것이다. 이것이 훗날 화근이 되었다. 야심 많은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이 이를 발판으로 각각 제2당 및 제3당을 형성했다.
그런데 계유정난 이전에 조선 정계에는 슈퍼 여당이 출현했다. 김종서가 안평대군을 정치적 파트너로 선정한 것이다. 이런 정황은 위의 <단종실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종서는 수양대군보다 강력한 안평대군을 끌어들임으로써 안평대군을 통제하고 정권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김종서는 수양대군을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김종서-안평대군 연합이 강력한 슈퍼 여당을 형성하고 수양대군은 더욱 더 초라한 제3당으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명회는 의외의 선택을 했다. 그는 왜소한 제3당을 선택했다. 당시로서는 집권 가능성이 희박한 수양대군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명회의 선택은 성공 가능성이 낮은 것이었다. 일종의 도박이었다. 한명회의 가족들은 "가도 꼭 그런 데만 가느냐?"고 핀잔을 줬을지도 모른다.
12·12 쿠데타 닮은 김종서 제거한명회가 수양대군을 선택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친구인 권람이 수양대군과 친했기 때문이다. 과거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특채로 하위직에 들어간 한명회가 김종서나 안평대군 같은 거물과 인연을 맺기는 힘들었다. 또 김종서나 안평대군 쪽에는 이미 인재들이 많아서 한명회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별로 없었다.
조선 전기 대학자인 서거정이 지은 <사가집>에 따르면, 한명회는 권람에게 "안평대군이 임금 자리를 엿보고 있으니, 수양대군이 나서야 한다"고 말했고, 권람은 수양대군에게 "만약 대군께서 나라를 얻고자 하신다면 한명회를 꼭 얻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한명회가 수양대군 캠프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쿠데타 1년 전 혹은 몇 개월 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