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이산가족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으로 평양에 가서 35년만에 어머니를 만났던 황준국 목사.
권우성
"그때는 정부에서 사진이나 돈은 갖고 가지 말라고 했다. 나는 목사라 고지식해서 그랬는지 안 가져갔는데, 다른 분들은 가져왔더라. 옷, 시계, 금반지는 사갔는데 돈을 못 드린 게 마음에 남는다."
허리춤까지 큰 눈이 쌓였던 1950년 12월 4일, 아들은 19살 나이로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면 초현리 집을 떠났다. 46살의 어머니는 "미군이 핵폭탄을 터뜨릴지 모른다니, 난리를 피해야 한다"며 운동화, 담요, 옷, 갱엿, 돈을 넣어서 꿰맨 코트를 담은 보따리를 매주셨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하나뿐인 누나도 시집간 뒤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았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는 목사님도 떠난 교회를 지켜야 한다며 5대 독자인 아들만 떠나보냈다.
생사도 알 수 없던 35년 세월이 흐른 뒤에야 다시 어머니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아들 황준국 목사가 분단 이후 처음으로 1985년에 성사된 '이산가족고향방문 및 예술 공연단' 일원으로 선정된 것이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어머니께 따뜻한 밥 한 그릇만 대접하게 해 달라"고 빌고 빌던 황 목사는 그해 9월 20일 3박 4일 일정으로 평양 고려 호텔에서 어머니 조희영씨를 만났다. 아들은 헤어질 때의 어머니보다도 더 나이가 든 54세의 장년이 됐고, 어머니는 81세의 백발로 변해있었다.
30년 동안 "어머니께 따뜻한 밥 한 그릇만 대접하게 해달라"24일 경기도 양주에서 만난 황준국(83) 목사는 29년 전 상봉 상황과 고향방문단 일정을 '당연하게도'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평양에 들어간 다음날인 21일 상봉 행사가 시작됐다. 처음에 뵈니, 어머니 같이 안 느껴져서, 우리 어머니 맞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둘만 하는 얘기를 꺼냈는데 바로 답을 하시더라. 어머니하고 얘기를 하는데 꼭 서너 명이 지켜보고 있어서 '음식 다 먹었으니 더 갖다 달라'고 쫓아 보낸 뒤에 대화를 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다가 살아계신 것 자체가 너무 감사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 아니었겠나."아들이 폭격으로 죽었다고 한 어머니는 고향에 만들어진 협동농장에 소속돼 농사를 지으면서 계속 혼자 사셨다고 한다.
평안남도 진남포로 시집갔던 누나도 전쟁 중에 배를 타고 남쪽으로 피난을 내려왔고, 황 목사는 전쟁 끝난 뒤 3년 만에 누나를 만났다. 황 목사는 "자식들 없이 계속 홀로 지내시던 어머니는 나하고 상봉한 뒤에도 혼자 외롭게 사셨을 텐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평양에 있던 9월 22일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고향방문단과 예술 공연단 단원 가운데 개신교 및 천주교 신자 50여 명이 고려호텔 3층 소강당에 모인 가운데 황 목사가 개신교 예배를 인도했고, 이어 지학순 주교가 미사를 집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