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죽음에 멈출 줄 모르는 눈물24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파이낸스센터 앞 광장에서 열린 '고 오혜란 대위 추모제'에서 오 대위의 아버지가 눈믈을 흘리고 있다.
유성호
"우리 딸이 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는지 제대로 밝혀주세요. 우리 오 대위가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도록 제발 도와주세요."늘 든든했던 맏딸을 황망히 잃은 아버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
24일 오후 7시, 서울 파이낸스센터 앞 돌계단에선 지난 해 10월 직속상관의 지속적인 가혹행위와 성추행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오혜란 육군 대위의 추모제가 열렸다.
앞서 지난 20일 육군 제2군단 보통군사법원은 군 형법상 군인 등 강제추행, 폭행, 직권남용, 가혹행위 혐의로 기소된 노아무개 소령에게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노 소령의 모든 혐의는 인정되지만 추행의 정도가 비교적 가볍고 초범인 점을 고려해 이같이 선고했다고 밝힌 바 있다.
군인권센터(소장 임태훈)가 주최한 이날 추모제에는 김상희 국회 여성가족위원장, 민주당 진성준, 배재정, 남윤인순 의원, 정의당 김제남 의원 등 정치인들과 시민 50여 명이 모여 오 대위를 추모하는 촛불을 밝혔다.
이날 추모제에서 김상희 위원장은 "얼마나 당차고 똑똑한 딸이었으면 이 나라의 안보를 책임지는 군인이 되겠다고 당당하게 장교로 임관했겠느냐"면서 "이런 딸을 잃고 슬픔에 빠진 아버님을 뵈니 억장이 무너진다"고 말문을 열었다.
김 위원장은 "어처구니없게도 상관에게 모욕을 당하고 성추행당하고 가혹행위를 당한 후 얼마나 억울했으면 오 대위가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겠느냐"면서 "대한민국을 지키겠다고 씩씩하게 나선 이 여성을 대한민국이 지켜주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또 김 위원장은 "이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여러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를 집행유예로 풀어주었다는 사실이 기가 막히다"면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예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오 대위의 명예를 되찾아주고 억울함을 풀어 주는 일"이라고 말했다.
진성준 의원은 "국방부와 군을 감시하는 국회 국방위원으로서 이런 처참한 사건이 발생한데 대해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 사건이 발생 직후 국방위원회에서 철저한 수사와 처벌을 주문했고 국방장관은 이와 같은 성희롱, 성폭력 사건에 대해서는 무관용의 원칙을 견지하겠다는 답변을 들은 바 있다"면서 "갑작스럽게 얼토 당토 않은 판결이 나와서 무척 놀랐고 당혹스러웠다"고 밝혔다.
진 의원은 "진작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봤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면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진전되면서 우리 군의 인권실태가 상당히 개선되어 온 것이 사실이지만, 여전히 국민적 감시의 바깥에 놓여 있고 사회적 감시가 소홀한 영역이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진 의원은 "오 대위 사건은 군에 대한 시민적 감시, 사회적 감시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족측 법률대리인 강석민 변호사는 "동료 법조인들에게 알아봐도 이번 군사법원의 판결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면서 "모든 공소사실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려놓고, 이에 대한 적절한 선고가 있어야함에도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 강 변호사는 "집행유예는 개전의 정이 현저하거나 피해자에 대한 합의 노력 등이 이루어진 경우 예외적으로 선고할 수 있다"면서 "이번 재판의 경우 가해자가 모든 범행을 부인했고, 오히려 '자신의 책임은 전혀 없다' '피해자가 잘못했다'는 식으로 변명했을 뿐 아니라 피해자 가족에 대한 합의 노력도 전혀 없었다, 이런 가운데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는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이라고 말했다. 대법원 양형기준을 살펴보아도 이번 사건에서 집행유예를 내릴 수 있는 요소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 강변호사의 지적이다.
추모제에선 앞서 이날 오전 국방부에서 열렸던 오 대위 사건 관련 육군의 비공개 브리핑도 도마 위에 올랐다. 이 자리에서 육군 관계자는 "언론에 부정확한 사실관계가 보도 되고 있다"면서 "성에 대한 언급은 없었음에도 유서에 '하룻밤 자면 편할 텐데' 등 성관계 요구가 있었던 것처럼 부정확한 보도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의 설명을 요약하면 가해자 노 소령이 오 대위에게 성희롱적인 발언을 하긴 했지만, 이것이 직접적인 성관계를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강 변호사는 "육군에서는 (가해자가) 성적으로 잠자리를 요구했다는 부분을 극구 부인하고 있다, 공소사실에 포함된 내용들은 단지 농담일 뿐이라는데, 국방부에서는 같이 자자는 말이 농담이 될 수 있느냐"고 꼬집었다. 그는 "이런 주장은 명백한 잘못"이라면서 "오 대위의 가장 친한 친구가 오 대위로부터 '같이 자면 편해질 텐데'라고 들었다고 진술한 내용이 분명히 유죄의 증거로 들어가 있다"고 지적했다.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가해자 노 소령에 대한 공판자료 중에는 지난 2월 11일 오 대위의 친구 박아무개씨가 법정에서 진술한 내용이 들어있다. 이날 박씨는 '오 대위로부터 노 소령이 회식자리에서 오 대위의 다리를 더듬거나 노래방에서 가슴을 만지는 등 성추행을 저질렀다는 말을 들은 적 있고, '같이 자면 편해질 텐데'라는 말을 들었다는 요지의 진술을 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