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이 노동을 했던 난창 트랙터 공장덩샤오핑은 문혁 시기 고통을 겪었지만 이곳에서 단련되어 미래를 바라볼 수 있었다
조창완
마오는 새로운 황제의 후임으로 화궈펑(華國鋒)을 낙점했다. 마오가 "당신에게 맡기면 안심이다"라는 말까지 했다. 하지만 '호박머리' 화궈펑은 마오가 부활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를 열어준 '오뚝이' 덩샤오핑(鄧小平)을 이겨내기에 그릇이 너무 작았다.
이 논쟁에서 승리한 사람은 이미 '흑묘백묘론'(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으로 민심을 얻은 덩샤오핑이었다. '오래 업드린 자는 반드시 높게 난다'(伏久者必飛高)라는 법구경(法句經) 말씀은 덩샤오핑(鄧小平)에게도 벗어나지 않았다.
66년부터 시작된 류사오치(劉少奇) 비판과 더불어 주자파로 낙인 되었고, 1969년 10월에는 난창(南昌)의 공장으로 유배에 가까운 하방을 당했다. 하지만 마오는 덩샤오핑(鄧小平)이 당적을 잃는 마지막 사태까지 가지 않도록 했고 그러므로 인해서 그는 부활할 수 있었다.
덩의 부활은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 1975년 1월 13일 제 4기 전국인민대표대회 1차회의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자신이 죽어가는 지 알면서도 회의의 업무보고를 했다. 저우는 지앙칭(江靑)에게 권력이 넘어가는 것을 막고, 덩샤오핑(鄧小平)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지를 가진 것 같다.
4기 전인대에서 덩샤오핑(鄧小平)은 당 부주석,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 위원, 국무원 제1부총리, 군사위원회 부주석과 해방군 총참모장직을 맡았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부활이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75년 2월 문혁(文革)의 여파로 정체되어 있던 철도를 뚫는 것을 시작으로 경제 살리기에 나섰다.
그해 말부터 상황이 호전되면서 덩샤오핑(鄧小平)의 인기도 올라갔다. 그러나 덩샤오핑(鄧小平)과 상극인 4인방은 1975년 12월부터 중앙정치국 회의를 열어 그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12월 20일에는 덩샤오핑(鄧小平)이 자아비판을 했다. 하지만 이달에 4인방의 지략가 캉셩(康生)이 죽었다. 그리고 덩샤오핑(鄧小平)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더욱 커갔다.
4인방은 1976년 4월 5일 첫번째 '톈안먼(天安門)사건'이 일어났다. 덩샤오핑(鄧小平)은 이들을 간접적으로 지원했고, 머잖아 다시 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하지만 마오의 사망 후 4인방이 분쇄되고, 덩샤오핑(鄧小平)에게 날아오던 화살들은 모두 거두어졌다. 그러나 덩을 두려워했던 화궈펑(華國鋒)은 마오의 재산을 계승하는 데 치중했고, 원로는 물론이고, 국민 등 모두의 마음을 잡기에 너무 약했다.
1977년 7월 16일부터 21일까지 열린 당 제 10기 3중전회에서 덩은 복권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자오쯔양(趙紫陽)과 후야오방(胡耀邦)을 양팔로 해서 헤게모니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솔즈베리는 그의 책 <새로운 황제들>에서 "1978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 덩샤오핑(鄧小平)은 화궈펑(華國鋒)을 허수아비로 전락시키고, 실권을 장악했다"고 본다. 물론 그의 뒤에는 예젠잉(葉劍英)을 비롯해 천윈(陳云) 등 원로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鄧小平)은 실권을 장악한 후 경제정책을 최우선으로 했다. 79년 4월 중앙위원회 업무회의에부터 현 중국 발전의 초석이 된 경제특구에 관한 논의를 시작했고 시행했다(자세한 내용은 경제 '외자기업이 없으면 중국 발전도 없다'에 자세히 있음).
그해 7월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는 농업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제 형태로 돌아갈 것을 주창하는 동시에 4개 현대화가 주로 거론됐는데, 여기에서 천윈陳雲)은 재정긴축을 요구하는 등 개방의 호흡조절을 역설했다. 80년 9월 덩샤오핑(鄧小平)의 오른팔 자오쯔양(趙紫陽)이 화궈펑(華國鋒)을 대신해 총리에 임명되면서 덩샤오핑(鄧小平)은 실질적으로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덩은 이후 다양한 외부환경 속에서 경제발전을 위한 토대 만들기에 치중했다. 다행히 1982년과 1983년 62억, 52억 달러의 무역흑자가 났다. 하지만 1985년은 이전의 폐쇄사회와 그간 진행된 개방 사이의 문제가 급속히 부상하기 시작했다.
조너선 스펜스는 당시에 "농업생산, 1가구1자녀정책, 공업 인센티브제와 경제특구, 지적 표현, 대미-대소관계, 당 조직과 군대의 정리와 재편, 인민저항의 합법성" 등이 초미의 관심사이자 불화의 근원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봤다.
이런 불안 속에서도 사회는 계속해서 변화해갔다. 막후의 실세인 덩샤오핑(鄧小平)은 1987년 11월 말 리펑(李鵬)을 임시 총리로, 당과 군대에 영향력을 가진 양상쿤(楊尙昆)을 국가주석으로 밀었다. 그러나 1988년 경제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물가는 계속 오르고 있었고 농민들은 환금작물의 재배를 위해 곡식생산이 줄어 배급제에 문제가 나기도 했다.
인사가 만사인 게 정치인데, 덩샤오핑(鄧小平)의 인사는 그다지 똑부러지지는 않았다. 가장 큰 예가 리펑(李鵬)의 무능력이었다. 마이니치 신문의 기자로 톈안먼에 관한 상세한 책을 쓴 가미무라 고지의 <중국 권력 핵심>에는 리펑(李鵬)에 관한 농담을 소개하는데, 그 농담 속에서 리펑(李鵬)은 "나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로 그를 소개할 만큼 경멸과 조롱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