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회] 그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뱀처럼 기어갔다

[무협소설 무위도(無爲刀)][34회] 단서

등록 2014.04.03 10:11수정 2014.04.03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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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장 단서

a 무위도 無爲刀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소주에서 체체염방을 찾기는 장님이 뒷간 찾는 것보다 쉬웠고, 염방의 상주 혁련지가 사죽헌에 거한다는 것을 알아내기는 벙어리가 손짓하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무영객은 대숲에서 반시진 정도 동향을 살피고는 사죽헌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과 침실, 서재, 모두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한 발 늦었군. 관조운과 혁련지가 어디로 갔을까. 이들이 움직였다는 건 무언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은화사나 금의위의 수배 때문이라면 조용히 숨어있는 게 낫다. 위험을 무릅쓰고 움직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는 두 남녀의 행방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집안을 유심히 살폈다. 집안이 어수선했다. 도둑이 들었다기 보다는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뒤진 것 같았다. 어쩌면 이곳 주인에게 자신이 원하는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행운이다. 그깟 서생놈을 찾는 것보다 훨씬 나을 수도 있으니까.

무영객은 그림을 떼어내고 한번씩 눌러보았다. 모두 단단한 벽이다. 비밀 창호는 없었다. 서재에 들어가니 그곳은 더 엉망이었다. 제자리에 꽂혀 있는 책들이 하나도 없고 모두 바닥이나 책상에 나뒹굴고 있다. 책장을 옆으로 제쳐 보았으나 붙박이다. 비밀통로나 이중문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다시 거실로 나와 장식장 쪽으로 가니 유건이 하나 놓여 있다. 오호, 서생이 확실히 여기 오긴 왔었군.

생각에 잠기던 무영객이 갑자기 허리를 굽히면서 동시에 상체를 동그랗게 말아 바닥을 데그르르 굴러 무릎 자세를 취했다. 그의 왼손은 허리춤에 찬 협봉도의 손잡이를 잡고 여차하면 뽑을 태세를 갖추었다. 무영객이 서 있던 자리의 벽에는 비도(飛刀)가 하나 박혀 있다.

거한의 사내가 현관 입구를 막고 서 있다. 그의 손에는 거한답게 수십 근이 나갈 것 같은 박도가 들려 있다.

"쥐새끼들이 자꾸 들락거리는 걸 보니 사죽헌에 쥐구멍이 많은 모양이구먼."
사내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영객이 일어서서 허리에 찬 협봉도를 천천히 뽑았다.


"뭐하는 놈이냐?"
"……"

무영객이 말이 없자 위약청은 한 발 앞으로 나서 박도를 허공에 휘둘렀다. 쏴악, 쏵, 허공을 가르는 타공음이 실내에 울려 퍼졌다.


"누군지 말하기 싫다면 안 해도 된다. 네 놈 따위가 누군지는 궁금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이곳에 왜 왔는지는 말해라. 그럼 용서해 주마. 아냐, 그래도 본 도사가 거동한 대가로 갈비뼈 서너 대쯤은 부러져주는 게 예의겠지."
"……"
"이 자식이 벙어린가, 이제 아예 벙어리까지 납시었군."

위약청이 비웃음을 지으며 제 자리에서 박도를 휘두르자 검광이 실내를 가득 메웠다.

호기가 가득 찬 놈이군. 미련한 곰 같으니라고. 무영객은 속으로 너털웃음을 웃었다. 가장 상대하기 쉬운 자들이 이런 부류다. 쉽게 움직이고 동작에 힘이 들어간다. 남에게 자신을 내세우고 싶어 하는 자들의 특징이다. 휘두르는 모양새를 보니 화산의 검법 나부랭이 같다. 절도가 있으나 부드러움이 없다.

식(式)을 강조하다보니 용(用)이 부족하고, 격(格)을 내세우다보니 변(變)이 모자라고, 형(形)에 집착해 화(化)를 놓치고 있다. 소위 명문정파라고 하는 유파들의 특색이라고 한 노인의 말이 생각났다. 수소문해서라도 남녀의 행방을 탐문해야 했었는데 제 발로 눈앞에 나타나주다니 잘된 일이다. 이 자를 추궁하다보면 단서가 나올 것이다.

미련 곰탱이 같은 녀석이 한 발 더 다가왔다. 한 걸음만 다가서면 서로의 공격 거리다. 곰탱이가 휘두르는 도가 제법 위협적이다. 만만하게 대적해서는 안 된다. 하긴 언제 만만한 적(敵)이 있었던가. 살수의 세계에서 방심은 곧 자신의 목숨이다. 여태 살아남은 건 여태까지 방심한 적이 없다는 증거다. 곰탱이가 한 발 더 들어왔다.

공격 유효 거리다. 초식의 기세가 맹렬했다. 곰답게 힘이 넘치는지 박도를 젓가락 다루듯 휘두른다. 검망의 틈이 제법 조밀하다. 무영객은 한 발 물러서며 옆으로 비꼈다. 방향이 바뀌자 곰탱이의 검세가 누그러지며 새로운 초식으로 바뀌었다. 틈새를 보았으나 출수하지 않았다. 더 좋은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 쏵, 쏵, 쏴악. 곰탱이의 박도가 누군가를 부르듯 허공에 소리를 질러댔다.

무영객이 다시 뒤로 물러서자 기둥에 등이 부딪쳤다. 그는 기둥 때문에 반 보 밖에 움직이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동작이 멈췄다. 이때다 싶은지 위약청의 박도가 사나운 기세로 그어왔다. 따악, 짧은 음향이 실내에 퍼지며 모든 동작이 일시에 멈췄다. 위약청은 바닥에 나뒹굴어 있고 박도는 기둥에 박혀 있다. 그의 무릎 뒤에선 터진 둑처럼 피가 콸콸 흘러 나왔다. 그 옆에는 무영객이 서 있다. 위약청을 내려다보며.

무영객은 일부러 상대를 유인했다. 검세(劍勢)에 짓눌린 듯 수세를 보이며 후퇴하면 공격하는 자는 신이 나서 더욱 힘이 들어가게 된다. 기둥에 등이 닿을 때 놀란 척 자세를 흩뜨리자 상대는 이를 노려 힘껏 휘둘렀다. 상대의 칼이 기둥에 박히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는 주먹 하나 차이로 칼날을 피함과 동시에 허리를 말며 상대의 뒤로 돌았다.

그리고 협봉도로 상대의 오른다리 오금을 베었다. 적은 중심을 일고 쓰러졌다. 오묘한 초식을 백 번 전개하는 것보다 지형지물을 한 번 이용하는 게 낫다. 노인의 말이다. 곰탱이는 이곳이 실내이고 자신의 덩치가 커 움직임의 폭이 제한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다. 대가는 클 것이다.

쓰러진 자는 미련한 곰답게 고통을 드러내진 않았다. 아니 그보다 자신이 어떻게 당했는지가 더 의아해 고통을 느낄 여유가 없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 밀려오는 통증과 함께 자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바라보면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때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아는 대로 분다.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자 곰의 얼굴에 점점 공포가 어리기 시작했다. 으음, 윽.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나오기 시작한다. 슬슬 시작할 때다.

"이 댁 주인 낭자와 서생은 어디로 갔나?"
낮고 조용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물었다.

"으으, 모른다!"
무영객은 말없이 협봉도로 위약청의 왼 다리 허벅지를 푹 찔렀다. 정확히 동맥을 끊어버리자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으악!"
곰탱이가 비명을 질렀다.
"말해, 어디로 갔어."
"으으으. 모른다. 너, 너는 ……본 도사가 누군줄 아느냐. 화, 화산오걸이다. ……후, 후환이 두렵지 않느냐."

위약청은 신음을 참으며 자신의 사문을 밝혔다. 화산파 소속이라면 강호의 어느 누구도 뒷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흑의인은 입가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화산오걸이고, 오거지이고 나는 모른다. 말하라,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으으, ……내가 ……네 놈을 언젠가는 씹어먹고 말 것이다."

제법 근기가 있는 놈이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무영객은 품속에서 가죽보를 꺼냈다. 위약청의 두건을 벗긴 다음 머리를 쓰다듬으며 침 놓을 자리를 찾았다. 그런데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이럴 경우 머리에 잘못 침을 놓으면 그대로 끝나버리는 수가 있다. 그는 목 뒤의 숨골과 경추에 자극을 가하기로 했다. 대추혈과 풍지혈을 찾기 위해 위약청의 옷깃을 잡아 제쳤다. 그러자 품속에서 몇 번 접은 화선지가 고개를 내밀었다. 무영객은 화선지를 펼치고는 입가에 미소를 씨익 지었다.  

 위 도사님께
 사문의 일로 사형과 함께 산서의 정주에 급히 가게 되었습니다.
 늦어도 한 달 이내 돌아올 것인데 그동안 염방의 일은 유 대인께 일임하겠습니다.
 혹시 급한 용무가 있으면 정주의 비룡표국으로 연락하기 바란다고, 유 대인께 전해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정주에 갔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럼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혁련지 拜

잠시 후 검은 그림자가 쏜살 같이 사죽헌을 빠져나갔다. 사사사삭, 한줄기 바람이 대숲을 가르고는 사죽헌의 담장을 넘어 창호를 흔들었다. 누군가 열어놓고 나간 창문에선 창호지가 바람과 눈이 맞아 잉잉댔다. 거실엔 웬 사내가 기둥에 상체를 기대어 쓰러져 있다. 오른쪽 가슴엔 날이 넓은 박도가 박혀 있고 그의 다리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뱀처럼 마룻바닥을 기어가고 있었다.  

간노인은 이제 한 마리 남은 한혈마를 어떻게 처분할까 고민되었다. 어제 호구를 만나 두 마리를 처분할 때만 해도 남은 한 마리는 안 팔아도 그만이라는 심사였는데, 하룻밤을 자고 나니 이제 남은 한 마리를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호구 덕분에 그동안의 손실을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 이문을 건졌는데도 불구하고 남은 한 마리로 고민하다니, 자신은 평생 장사꾼으로 마음 졸이며 살아야 하는 팔자인 모양이다. 행운은 한 번이면 족할 것을, 연달은 행운은 언감생심 어불성설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람의 심리라는 게 묘해서 어제 팔았다고 오늘 또 못 팔게 뭐람 하는 심사가 들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갈 채비를 하고 있다. 파장이 가까워오자 간노인은 여물통과 배변을 치우며, 사람 참 욕심도, 혀를 끌끌 차며 자신의 과욕을 나무랐다. 다른 말들은 몰이꾼에게 맡기고 하나 남은 한혈마를 자신이 고삐를 잡고 마구간으로 몰아갈 참이었다.

"영감, 그 말 한번 봅시다."

간노인은 무척 싸늘한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목소리에 따라 손님을 차별할 순 없는 법. 노인은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돌아섰다.

목소리의 주인은 검은 옷을 입고 검정 상투끈을 맸다. 체격이 다부지나 한편으론 날렵하게 보였다. 각진 얼굴이 딱딱한 인상을 풍기는데 목소리까지 싸늘하니 절로 거리감이 생겼다. 

"이 말은 서역의 한혈마인데, 야생이라서 다루기가 힘들다오."
간노인이 설명조로 말을 가리켰다.

"상관없소. 야생이면 체력 하나는 믿을만 하겠구먼."

검은 옷의 사내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럼요, 체력은 여기 풍성장 마장에서 이 눔을 따라올 말이 없습죠. 게다가 빠르긴 어찌나 빠른지. 다만 다루기가 좀 힘들다오."
"좋소, 얼마요?"

검은 옷의 사내가 대뜸 호의를 보인다. 어라? 이 자도 어제의 남녀처럼 호군가. 대개 사람들이 말을 흥정할 때면 관심이 있으면서도 없는 척 하며 딴청부리다 금액을 깎아달라고 한다. 장사꾼의 입장에선 그게 눈에 보여 적당히 밀고당기다 속아주는 척하면 거래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자는 대뜸 단도직입으로 치고나온다. 고순가 호군가.

사내는 말을 한 바퀴 돌며 털의 윤기와 다리 근육을 살폈다.
"영감, 빨리 말해. 시간 없으니까."
사내가 재촉한다.

간노인은 연일 찾아온 행운이 믿기지 않았지만 에라이, 하는 심정으로 또 한번의 행운을 시험해보았다.

"은자 30냥이오."
"좋소. 빨리 안장을 얹어주시오."
사내는 흔쾌히 승낙하며 품속에서 은화를 꺼낸다.

히이이잉, 타닥 탁, 한혈마는 무언가를 예감한 듯 사납게 앞발을 들었다 놓으며 뒷발을 찼다. 뽀얗게 먼지가 일더니 바닥에 깊게 팬 자국이 생겼다. 그런데 사내가 올라타며 워워, 하자 웬일인지 검정 한혈마는 오래된 주인을 만난 듯 온순해졌다.

별일이다. 간 노인은 사내를 쳐다보았다. 검은 옷에 검은 상투, 거기에 검정말이라 저승사자가 따로 없구먼. 그런 외양은 저승사잔데 쓰임새는 천상선녀다. 노인은 그 나이 먹도록 얻은 진리를 새삼 떠올렸다. 사람은 외양을 보고 판단할 수 없다는 것.

이랴!
사내가 뒤꿈치로 배를 툭 건드리자 한혈마는 물길을 거스르는 연어처럼 펄떡이며 뛰쳐나갔다. 오늘도 석양이 서산마루에 걸렸다. 어제 남녀가 간 방향으로 사내도 역시 석양을 향해 달려들었다. 올 여름에는 불나방들이 꽤나 마장을 괴롭힐 것 같다고 노인은 생각했다.

뜻밖의 횡재, 그것도 하루도 아니고 연 이틀 계속된 횡재에 어안이 벙벙해진 노인은 세상 오래살고 볼일이야,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마장을 나섰다. 은화가 담긴 묵직한 주머니를 행여 남들이 알아차릴까 은근히 괴춤에 사리면서 그는 생각했다. 변방에 수자리(변방의 국경에서 근무를 해야 하는 군대 의무) 가야할 아들놈의 군역을 면제해 달라고 관아 서리에게 뇌물로 바칠까. 아니면 새우젓 장수 황가 놈이 한 몫 잡은 김에 맛봤다는, 기가 차다며 몇날 며칠을 눈꼴시게 자랑하던 추월이, 고 년한테 가볼까.

추월이는 삼류 기루(妓樓)인 화청각에서도 한물간 퇴기(退妓)지만 자기와 같이 노인 축에 드는 사람에겐 여전히 깐깐한 기녀일 뿐이다. 간 노인은 고개를 홰홰 저었지만 쪼글쪼글한 할멈 가슴보단 훨씬 그럴듯한 추월이 년 가슴이 눈앞에서 점점 커져왔다. 좋아, 이번에는 추월이 년한테 가고, 가을에 서역의 마상들이 오면 그때 한혈마를 한 열 마리쯤 들여놓지 뭐. 간노인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눈앞에서 점점 커져만 가는 추월이 년의 가슴을 노려보았다. 석양이 노인의 눈을 붉게 물들였다. 
덧붙이는 글 월, 목 연재합니다.
#무위도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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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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