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회] "침입자들은 기만술을 썼어요"

[무협소설 무위도(無爲刀)][33회] 춘계문답 (5)

등록 2014.03.31 14:22수정 2014.03.31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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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춘계문답

a 무위도 無爲刀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염방 일은 어떻게 하고?"
"류구에 상단을 파견하는 건을 관에서 하루 이틀 만에 허가해 주진 않아요. 태원상계의 견제도 있으니 적어도 두어 달 이상은 걸리겠지요. 그리고 평소처럼 일어나는 일은 유(劉) 대인이 알아서 하실 거예요. 선대부터 저희 염방의 집사 일을 해오신 분이니까요."


혁련지가 붓과 종이를 꺼내더니 연적에서 먹을 부어 급히 적기 시작했다.

"위 도사에게 사정이 있어 사형과 급히 떠나게 됐다는 전갈을 남기는 거예요."
"그 친구 몹시 실망하겠는 걸. 갑자기 사형이란 자가 나타나 사매와 같이 떠나면 오죽 속이 끓을까. 쯧쯧."
"사태가 가라앉고 나면 제가 차근차근 설명해주죠."

글씨를 써내려가던 혁련지가 아, 하고는 붓을 내려놓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생각에 잠겼다.

"사형,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어요."

그녀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뭐야, 위약청이 따라 올까봐 그러는 거야."
"아뇨,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셋째 사숙어른 문제예요."
"셋째 사숙이라면 장강편운 습평 사숙을 말함인가?"
"네, 맞아요. 그 습평 사숙어른이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두 달 가량 됐어요."

"그래? 사매는 셋째 사숙과 연락을 하고 지냈나? 내가 알기론 셋째 사숙은 비천문이 해산되면서 강호를 떠나 은일자로 생활하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이런 사숙과 어떻게 연락을 하고 지낸다는 거지?"


"사실 셋째 사숙어른은 저희 사부님과 가끔 소식을 주고받곤 했어요. 네 제자가 비천문을 나오면서 각지로 흩어져 각자의 길을 갔지만, 사부님과 셋째 사숙님만은 뜸하게 연락을 주고받았답니다. 은자로 지내는 셋째 사숙님의 뜻을 존중해 사부님이 직접 만나진 않았지만 어디에 은거하고 것쯤은 알고 계셨죠. 제가 사부님을 졸라서 여쭤보니, 여기서 얼마 멀지 않은 항주의 서호에서 지내시고 계셨습니다. 낚시로 세월을 낚고 계신 거였죠. 그래서 제가 소주로 온지 얼마 안 됐을 때, 그러니까 사년 전이죠, 주제넘게 제가 셋째 사숙어른을 찾아 뵀습니다. 강호의 연을 끊으신 분이라 혹시 역정이라도 내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오히려 반갑게 대해 주시더군요.

그 후로 가끔 제가 소금도 보내고 소주에 초청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 전쯤 소금상이 저한테 소식을 전해 줬습니다. 소옹이, 그 동네 사람들은 사숙어른을 틍소를 부는 노인, 소옹이라고 불렀답니다.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안타까웠지만 이미 운명하셨다니 제가 달리 해드릴 것도 없어, 상심만 하고 사부님께도 이 소식을 전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그 즈음에 류구에 상단을 파견하는 문제로 제가 경황이 없어서 사부님께 소식을 못 전하던 차에 사형까지 나타난 것입니다."

혁련지는 잠시 한숨을 돌리더니 입술을 지그시 깨물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제가 방금 붓을 놀리고 있는데 셋째 사숙어른이 돌아가신 게 혹시 사부님과 같은 이유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더군요. 혹시 사숙님도 병으로 돌아가신 게 아니라 괴한의 습격으로 돌아가신 것은 아닐까. 불과 두 달 사이에 사형제(師兄弟)가 나란히 돌아가셨습니다. 한 분은 아무도 모르게 가셨고, 한 분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며 돌아가셨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게 강호의 많은 눈과 귀가 사부님들의 사형제를 주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관조운은 혁련지의 말을 듣고 보니 두 사형제 간의 죽음 사이엔 확실히 의심의 여지가 있었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어떤 인과관계가 숨어 있을 수도 있다. 당장에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의심할 만한 것은 의심하며 모든 경우를 살피는 게 낫다.

"가만, 사매. 혹시 사매의 집을 엉망으로 만든 자들이 혹시 이와 관련된 자들이 아닐까?"
"무슨 말씀이시죠?"

혁련지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 말은, 사매 집을 난장판으로 만든 것이 태원상계의 청부를 받은 무뢰배들 짓이 아니라, 어쩌면 스승님을 습격한 자들의 일당이 사매의 집을 수색한 것은 아닐까 하는 추리를 해보자는 거야. 스승님이 사매에게 많은 얘기를 들려주셨고, 딸처럼 손녀처럼 귀여워하며 심적으로 많은 애정을 준 것을 알고 있는 자들이라면 혹시 사부님이 무극진경이나 그와 관련된 실마리를 사매에게 남겼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사매 집을 수색할 수도 있지 않을까?"

혁련지는 붓을 놓고 일어서더니 방안을 서성거렸다. 이윽고 주방에 들어가더니 이내 소리를 높였다.

"사형 말이 일리가 있어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아뇨, 그럴 가능성이 더 높아요."

그녀가 다시 나왔다.  

"사실 살림 따위를 마구 부순다고 제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여자라는 건 태원상계 사람들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대개 여자들이 아끼는 곳이 주방이에요. 만약 저를 위협하고 제 속을 상하게 할 의도였다면 주방을 엉망으로 만드는 게 효과적이죠. 그런데 방금 다시 들어가보니 주방은 멀쩡해요. 뒤진 흔적이 없어요. 서재나 거실과 침실은 다 뒤집어놓고 주방을 빠뜨렸다는 건 그들이 찾는 게 주방과 무관하다고 여긴 거예요. 맞아요. 사형 말처럼 그들은 나에게서 무엇인가를 찾으려 했어요. 특히 책들은 일일이 낱장을 넘긴 흔적이 있고, 종이나 서류는 하나도 빠짐없이 훑은 자취가 있어요. 그들은 태원상계와 무관한 자들예요. 그런데 일부러 경고장을 붙이며 태원상계가 청부한 자들인 양 했어요. 기만술이죠."

혁련지는 치가 떨리는 듯 입술을 깨물며 음, 하고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아네요. 사형. 그 자가 오기엔 시간이 안 맞아요. 금릉에서 소주까진 아무리 빠른 말로 달려도 하루 반나절 거리인데, 집이 엉망이 된 건 빨라야 그저께거든요. 제가 사흘 전에 이 집에 왔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사형이 은화사에서 탈출한 그날이나 그 다음날에 누군가 와서 뒤진 거라고 봐야겠네요."

"그렇다면 태원상계 사람들이 와서 위협한 게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이란 말인가."
"꼭 그렇지도 않아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태원상계에서도 이런 식의 유치한 협박이 저한테 안 통한다는 것쯤은 알 것이라 믿어요. 제 뒤에 아미파와 비영문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고, 정 위협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교묘한 수법을 사용할 수 있거든요. 차라리 소금창고에 불을 지르던가 아니면 운송 중인 소금을 습격한다든지 혹은 저희 염방에서 발행한 어음을 위조하는 등 저를 협박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많죠."

그녀는 또 입술을 잘근잘근 싶었다.

"차차 밝혀질 것이오. 사매."

관조운이 멋쩍게 말했다.

"오, 그나저나 무슨 이유에선지 나도 표적이 되어 있는 것 같군요. 이렇게 되면 저도 넷째 사숙어른을 안 찾아 갈 수가 없네요."
"이 모든 것이 넷째 담곤 사숙어른에게 가보면 풀릴 것이네. 가만, 혹시 넷째 사숙도?"

관조운이 말했다.

"맞아요. 어쩜 넷째 사숙어른에게도 이미 무슨 해가 있을지 모르겠군요."

혁련지가 맞장구쳤다.

"혹시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다면 위험이 닥칠 수도 있다고 우리가 알려드려야겠군."

혁련지는 다시 붓을 들어 위약청에게 남기는 글을 마무리하고는 화선지를 접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시장에 가서 사형 옷이나 한 벌 사죠. 유생 차림은 금의위 눈길을 끌 테니, 다른 옷으로 바꾸도록 해요. 먼저 그 유건부터 벗어요."

그러고 보니 쫓기던 복장 그대로다. 관조운은 유건부터 벗어 거실 구석에 있는 장식장 위에 놓았다.

서산으로 해가 설핏 기울며 완만한 능선을 비추자 소주의 소란스런 상가(商街)도 휘장을 거두며 마칠 채비를 하고 있다. 소주 외성 부근의 유명한 마장(馬場) 풍성장의 점두 간(看) 노인은 하루를 마감하며 말들을 마구간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다른 말들은 다 순하게 마구간으로 들어가지만 서역의 한혈마(汗血馬)는 아직도 길이 안 들어 마구간에 들이기가 여간 쉽지 않다. 이들 한혈마는 천산(天山)의 야생마였는데 사냥꾼들이 겨우 포획했다고 한다.

서역의 마상들이 소주까지 데려온 것을 간노인이 다섯 마리 사들였다. 그러나 거친 야생마를 선뜻 사가는 사람이 없었다. 지난 칠 개월 동안 금의위 무사와 기마술에 미친 무관의 자제가 각각 한 마리씩 사갔을 뿐이다. 나머지 세 마리는 언제 처분할지 기약이 없다. 이놈들은 사료도 많이 먹었다. 선금을 지불했는데 사료도 많이 들고 게다가 다루기도 힘들어 자칫하면 몰이꾼들이 채이기 십상이니 한마디로 애물단지였다. 간 노인은 야생마를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래도 서역 마상들에게 당한 느낌이 들었다. 야생마들을 마구간에 몰아넣고 나면 채찍으로 엉덩이를 한 번 씩 때리는 것으로 분을 풀곤 했다. 

워,워, 쯧쯧쯧.

간 노인은 채찍을 휘두르고, 고삐를 죄었다 풀었다 이끌었다 하면서 평생 말을 다룬 사람답게 조심스레 끌고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혈마들은 세 발자국마다 히이이잉, 하며 앞발을 높이 쳐들었다가 발굽을 땅에 내리찍었다. 그 소리가 땅을 울리며 파장(罷場) 무렵 마장의 정적을 깨뜨리고 있다.  

"잠깐 그 말들을 볼 수 있을까요?"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노인의 귀에 들렸다.

돌아보니 훤칠한 키의 남녀가 다가오고 있다. 둘 다 이십대 중후반쯤 돼 보였다. 남자는 갸름한 얼굴에 해사한 낯빛이 책상물림 같은데 차림은 무인들이 흔히 입는 경장이다. 여자는 큼직한 눈 사이로 오뚝한 콧날이 돋보이는 미인이다. 여자 역시 경장 차림인데 오히려 여자가 검을 차고 있다.

"이 놈들은 천산에서 데려온 야생마라 어지간한 기마술이 없고는 타기가 힘듭죠."

간 노인이 잘 빠진 외양만 보고 사려다 야생마라는 말을 듣고 내빼는 사람일까 싶어 미리 설명을 했다.

"괜찮아요. 먼 길을 빨리 가야 하는데 체력이 강한 녀석을 일부러 사러 왔어요. 저쪽 상인이 노인에게 가라고 그러더라고요."

여자가 대답했다.

오른쪽에 있던 밤색 점박이 말이 낯선 사람을 위협하듯 히이이잉 울며 앞발의 치켜들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갈퀴가 곤두섰다.

"그래, 이 놈으로 하죠."

여자가 점박이 말을 찍었다.

왼쪽에 있는 말은 전신이 새까맣고 윤기가 자르르해 건강해 보이기는 하나 미간에서 코까지는 하얀 털로 덮여 있어 선명한 대비가 일었다. 남자는 그 뒤에 있는 붉은 기운이 감도는 말을 택했다. 비교적 순한 것 같으면서도 털에 윤기가 흘렀다.

남녀는 흥정다운 흥정도 하지 않고 값을 후하게 쳐주었다. 간 노인은 파장 무렵에 이게 웬 횡재인가 싶었다. 덕분에 절대 공짜로 주지 않는 고급 안장도 얹어주었다. 말들은 야생마답게 제자리에 가만있지 않고 연신 푸르르 푸르르 투레질을 하며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여자는 고삐를 인계 받자마자 등자도 밟지 않고 가볍게 올라서는데 남자는 등자는커녕 노둣돌을 받쳐주고서야 겨우 등에 올라탔다.

이랴, 여자가 소리치자, 이랴, 남자도 따라 소리쳤다.

말들은 오랜만에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음을 직감했는지 한차례 울음을 길게 내뱉으며 쏜살같이 마장을 벗어났다. 간 노인은 걱정스레 남자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다행히 노인의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남자는 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서산으로 떨어지는 해가 남녀의 뒷모습을 붉게 비추었다. 어딘지 모르지만 급하게 달려가는 남녀를 보며 노인은 마치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 같다고 생각했다.
덧붙이는 글 월, 목 주2회 연재합니다
#무위도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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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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