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로 살아가는 당신, 행복하십니까

[서평] 제니퍼 시니어의 <부모로 산다는 것>

등록 2014.05.06 14:32수정 2014.05.06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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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로 산다는 것> 책표지.
<부모로 산다는 것> 책표지.RHK
자식이 셋입니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여유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아내와 둘이서 오붓하게 영화를 본 게 언제였나 싶습니다. 결혼 10년이 다 되도록 단 둘이 여행 한 번 떠나지 못했습니다. 여행은 고사하고 흔하디 흔한 커피집조차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참 묘하지요. 저와 아내 없이 저희끼리 잘 노는 아이들을 보면 문득 알지 못할 상실감을 느낍니다.


몇 년 전 큰딸이 처음으로 학교에 간 날은 온종일 우울했습니다. 이상한 건 그런 상실과 우울함 끝에 알 수 없는 충족감이 찾아오곤 했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기쁨과 보람, 성취감 대충 그런 말들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을요. 부모로 산다는 게 바로 이런 건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부모로 산다는 것>. 책 제목만 보면 언뜻 흔해 빠진 육아 서적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책에는 자녀 양육의 매뉴얼이 나오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육아 기술 또한 없습니다. 옮긴이는 이 책을 아이가 아니라 부모에 대한 책으로 규정합니다. 옮긴이를 따라 달리 말해 보자면, 즉각적인 효과를 보장하지만 재발 가능성이 높은 대증요법이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 닥치는 온갖 문제를 원인요법 방식으로 다루는 책입니다. 원인요법이기에 효과는 더디지만 원인의 뿌리를 밝혀주니 결과가 확실할 듯합니다.

자녀 양육 매뉴얼이 없는 육아 서적

어찌 보면 어리석은(?) 질문을 던져봅니다. 세상의 부모들은 원래부터 자녀들을 온갖 정성과 관심을 쏟으며 키웠을까요. 이 책에 따르면 미국 부모가 지금과 같은 양육 방식을 쓰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였습니다. 채 70여년 밖에 안 되지요.

"부모로서 우리는 때로 우리가 놓여 있는 이런 환경이 과거의 환경과 동일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놓여 있는 이런 환경과 상황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부모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모습이 얼마나 새로운지 그리고 얼마나 특이하고 비역사적인지 명심하지 않으면, 부모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여전히 건설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다." (216쪽)


그 전시대의 아이들은 노동을 했다고 합니다. 농장이나 거리, 공장 등에서 일을 하는 것을 모두 당연하게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해서 가족 경제에 보탬을 주기도 했죠. 명저 <아동의 탄생>에서 근대 이전의 어린이가 '작은 어른'으로 간주되었다고 한 프랑스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의 말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그뒤 미국에서 어린이들이 가족의 새 '권력자'가 되기 시작한 것은 아동 노동 금지 법안들이 의회에서 통과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이때부터 가족 경제의 부담은 오로지 부모에게 맡겨집니다. 저자는 '돈 먹는 하마'가 돼버린 아이들을 부모들이 양육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손아랫사람에서 손윗사람으로 바뀌었다고까지 말합니다.


저자는 도시계획 전문가인 윌리엄 화이트가 1953년 <포춘>에 게재한 기사에서 전후의 미국을, '자식'이라는 뜻의 'filia'와 '무정부 상태'라는 뜻의 'anarchy'를 합성한 신조어 'Filiarchy'로 묘사한 사실을 인용합니다. 손윗사람이 돼버린 아이들이 가족 내 질서를 교란했다면서요. 

이런 역전 현상은 오늘날 중산층에 한층 뚜렷한 행동 결과를 낳았는데, 라루는 <불평등한 어린 시절>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중산층의 어린이는 자기 부모에게 자기 의견을 주장하면서 대들고, 자기 아버지의 무능함을 불평하며, 부모가 내린 판단을 헐뜯고 방해한다."(213쪽)

오늘날 부모에게 대들고, 부모가 자신들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자식들을 보는 건 낯설지 않습니다. 저자가 '전쟁'으로 이름 붙인 교육 문제를 통해 좀 더 구체저으로 살펴볼까요.

저자는 '트로피 아내'에 빗댄 '트로피 아이'라는 신조어를 소개합니다. 트로피 아내는 능력과 재력을 갖춘 남자가 성공에 대한 보상으로 얻는 젊고 아름다운 아내를 가리킵니다. 풍자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트로피 아이는 자녀가 이룩한 비범한 성취를 자랑하고 싶은 부모들을 꼬집습니다.

예를 들어 보지요. 저자가 미국 중산층의 교육 방식으로 규정하고 있는 '집중 양육' 개념이 있습니다. 2002년 사회학자인 아네트 라루가 써서 고전 반열에 오른 <불평등한 어린 시절>이라는 책이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은 집중 양육을, 바쁜 부모에게 극심한 노동을 요구하고 아이들을 지치게 만들며, 가족 집단이라는 발상이 성장할 기회마저 희생시키면서 개인주의가 자라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강조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미국식 집중 양육 결과... 부모 권위에 도전하고 거부

미국식 집중 양육의 결과는 서늘합니다. 저자는 부모의 배려를 감지한 (특히 중산층의) 아이들이, 과거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했던 거친 말과 욕을 자신들의 부모에게 돌려주고 있다고 말합니다. 부모의 배려와 관심 등으로 충분한 권력을 부여받은 아이들이 부모들의 그런 태도 때문에 부모의 권위에 도전하고 심지어 거부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저자는 미국인 부부가 단 둘이 보내는 시간이 한 주 평균 1975년 12.4시간에서 2000년 9시간으로 크게 줄어든 점, "숙제가 우리 가족의 새로운 저녁 식사"(293쪽)가 돼버렸을 정도로 자식을 위한 부부들의 이른바 재능봉사가 사회가 아니라 자기 아이들을 위한 것으로만 향하는 경향이 생겨난 사실 들도 언급합니다.

"사람들이 각자 살아가는 세상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있으며,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내면적인 압박감은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든간에) 점점 더 커진다. ··· 다른 나라 그리고 다른 시대라면 노인을 봉양하고 사회운동에 참여하며 시민 리더십을 발휘하고 봉사 활동을 열심히 수행함으로써 이런 과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미국에서는 아이를 키우는 일이 그 대부분의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지금 미국에서는 양육과 관련된 책들이 이미 성서가 되어 버렸다." (294쪽)

자식에게 다 걸기하는 우리나라 많은 부모의 모습과 겹치지 않습니까. 자식이 결혼한 후까지 그 근처를 떠나지 못하는 '헬리콥터 맘'도 떠오릅니다. 그런데 저자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상실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아이가 어느 날 자기를 훌쩍 떠나갈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쏟아부어서 강하게 키우는 것이 부모가 수행해야 하는 역설의 역할이기 때문이라면서요. 저자가 인용하는 C. S. 루이스의 말이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이 아이들이 머지않아서 우리의 가르침을 필요로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선물의 사랑(부모가 자녀에게 조건 없이 주는 사랑을 가리킴.)에는 무거운 과제, 스스로를 파기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다."

아이들 똥기저귀를 갈면서 투덜댔습니다. 이제는 그 투덜대는 것조차 맛보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놀자고 보챌 때 뒤로 미룰 때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놀아달라는 말을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때가 올 것입니다. 마트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달라고 막무가내로 조르는 막둥이 때문에 당황하고 짜증이 났던 기억도 납니다. 하지만 제 언니나 오빠가 그랬던 것처럼, 막둥이도 언젠가는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을 자기 스스로 사 먹겠지요.

며칠 전, 교무실에서였습니다. 점심식사 후 차 한 잔을 마시던 중이었습니다. 옆 자리에 계시던 한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어떤 사람이 페이스북에 아이들 학원 보내고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일 앞으로 하지 않겠다고 써 놨네요. 맞는 말이지 않아요? 애써 키운 자식들이 이렇게 허망하게 떠나버릴 수도 있는 세상이니 사랑한다고, 마음껏 놀며 지내라고 여유를 찾아야 하지 않겠어요?"

세월호 사고 이후 우울과 상실감에 빠진 우리나라 부모들 마음이 그렇지 않을까요. 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부모로 산다는 것은, 아이를 내 안에 간직하는 일이 아니라 저 넓은 세상으로 내보내는 일에 그 진정한 목표가 있다고 여겨서입니다. 그런 믿음과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들이 한껏 날개를 펼치며 멋진 삶을 살아갈 수 있겠지요.

사랑한다는 말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살아가는 가족들이 많습니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마음껏 사랑을 나누는 푸른 오월이 되기를 바랍니다. 비움과 내려놓음이 주는 여유도 한껏 누려보시고요.
덧붙이는 글 * <부모로 산다는 것>(제니퍼 시니어 지음, 이경식 옮김 / RHK / 2014. 4. 19. / 478쪽 / 16,000원)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부모로 산다는 것 - 잃어버리는 많은 것들 그래도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

제니퍼 시니어 지음, 이경식 옮김,
알에이치코리아(RHK), 2014


#<부모로 산다는 것> #제니퍼 시니어 #자녀 #행복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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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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