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진주시 하대동 옛 골목길
진주같이
"선학산은 경치도 좋고 접근성이 좋아 도동 주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이지요. 도심 한가운데 이리 쉽게 갈 수 있는 산이 있다는 건 주민들 복이지요."도동. 진주 사람들은 뒤벼리 뒤쪽 동네 혹은 진양교 건너 동네를 통칭해서 '도동'이라했다. 물론 이는 진주 원도심(지금의 중앙동) 기준으로 그랬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고려부터 조선 전기까지는 진주 목(晉州牧)의 동면(東面)이라 했다. 진주의 동쪽에 있는 면이란 뜻이겠다. 이후 도동면이라 불리었는데, 진주가 도청소재지였던 점을 감안하면 도청의 동쪽이란 뜻으로도 짐작이 된다. 도동면은 1938년 지방행정구역 명칭으로 사용치 않게 됐다.
지금의 하대동은 1949년 정부 수립으로 진주시가 38개동으로 개편할 때 상대동에 속해 있다가 1992년에야 분리된 것이다. 하대동이라는 지명은 이때 생긴 것으로 이제 20년이 조금 넘은 지명이다. 하지만 조선 말에는 하평촌,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하대리 등으로 불리었던 것으로 보아' 하대동' 지명에는 옛 지명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대동 '도동 모래땅' 일군 기적같은 삶들이 있어하대동은 다시 1997년 하대1동과 하대2동으로 나뉘어졌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하대 1동과 2동 거주 인구는 3만 명 정도. 진주 인구의 9%가 넘는다. 주거 밀집 현상이 빚어지면서 상권이 급격히 발달했다. 70년대 우동 한 그릇값이 땅 한 평.
"하대 35종점에서 탑마트 사거리까지 그 일대를 둘러보면 별의별 게 다 있어요. 요즘은 상권이 주거지역과 따로 분리되지 않는 특징이 있는데 하대동도 아파트 밀집지역에 식당, 주점 등이 많이 들어서 있지요. 참말로 마이 좋아졌지예. 옛날에 논밭이던 땅들이 인자는 금싸라기 땅이 됐심니더."하대동은 30년 전만 해도 진주 시내에서 보자면 가장 외곽이었다. 시내에 사는 사람들이 일 년에 한 번 올동말동한 동네였다는 것이다. 이곳은 40년 전만 해도 모래땅에다 허허벌판 논밭이었다.
"지금이야 상권이 발달한 동네지만 40년 전만 해도 이 동네 사람들이야 농사 짓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요. 당시만 해도 땅 한 평이 우동 한 그릇 값이었으니께."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상평동에 공단이 들어서면서 더러 공단 노동자가 되었다. 공단이 형성된 후 인구는 대폭 증가했고 하대주공아파트 등 공동주택단지가 차례로 들어섰고 상권이 빠르게 형성됐다.
1990년대 이후 하대동은 가히' 상전벽해'라 할 만했다.하대동 강변쪽으로 따라가다 보면 초창기 자리 잡은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폴리텍대학(옛 직업훈련원)과 프란치스코요양원, 한센부설병원 등이 있고 하대동의 대단위 공동주택인 현대아파트가 있다. 현대아파트는 예전 진주실업전문대학(진주실전) 터였다. 진주실전은 1970년대 후반 진주여자실업대학으로 설립해 곧 진주실업전문대학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이후 문산으로 옮겨 4년째 대학인 진주국제대학으로 승격됐다.
하대동에서 빼놓지 않고 이야기 할 곳은 '마산교구 하대동 성당'이다. 이곳은 1986년 설립됐다. 하대동에 인구 밀집이 이뤄지던 초창기다. 그후 하대성당은 하대동 주민의 삶과 같이 해왔다. 특히나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시기 이곳은 지역과 함께 해왔다.
"굉장했지요. 허철수, 김영식, 박창균 주임신부가 생각나네요. 농민, 노동자가 많은 지역이라 그런지 지역 사안은 물론이고 민주화 운동에 항상 앞장섰으니까요."당시엔 그만큼 도동지역에서 하대성당이 구심점 역할을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대성당에서 다시 강변 현대아파트 앞으로 가면 알록달록한 건물이 눈에 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