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이 정신병리학적인 단어가 이토록 익숙하게 우리 일상 곁을 맴도는 때가 또 있었을까?
우리는 각자 자신이 가진 과거의 상처에 발목이 묶인 채 허우적대는 모습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현재 우리 사회는 또 다시 커다란 트라우마를 거기에 얹는다. 미나토 가나에의 <왕복 서간>은 그런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을 당연시 하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에 새로운 거울을 제시한다.
미나토 가나에의 서술 방식은 독특하다. 일반적인 소설이 그 속의 이야기를 플롯에 따라 진행시키는 것과 달리, 미나토 가나에는 그 사건의 외곽에서 그 사건을 들여다 보듯이 진행시킨다. 가장 최신작인 2013년에 출간한 <모성>은 극중 주인공과 등장 인물들의 일기 형식을 빌어, 주인공 모녀의 모성을 들여다 본다.
그보다 앞선 <N을 위하여> 역시 각 인물들의 고백 형식으로 한 부부의 살인 사건을 조명한다. 그들이 서술하는 바에 따라 같은 살인 사건은 전혀 다른 각도의, 전혀 다른 입장의 사건으로 재조명된다. 그리고 <N을 위하여>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2012년 발간한 <왕복 서간>은 제목으로도 알 수 있듯이, 편지 형식의 중편 세 편이 담겨져 있다.
<왕복 서간>은 <N을 위하여>처럼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과거의 상처를 들여다 보는 방식이다. 그래서 제목도 각각, '십년 뒤의 졸업 문집', '이십년 뒤의 숙제', 그리고 '십 오년 후의 보충 수업'이다. 흘러간 세월을 의미하는 십년, 십오년, 이십 년 후라는 단어 외의, 졸업 문집, 숙제, 보충 수업이 세 작품의 정체성을 의미한다. 졸업 문집은, 십 오년이 흘러서야 함께 졸업 문집을 만들어야 하는 친구들의 이야기, 그리고 숙제는 말 그대로 선생님이 내주신 숙제를 의미한다.
그리고, 보충 수업은 학창 시절 다하지 못한 과제가 담겨져 있다. 하지만 이런 '우아한 제목'과 달리, 그 속에 담긴 내용들은 언제나 미나토 가나에의 그렇듯이, 지아키의 상해 사건, 다케자와 마치코 선생님 부군의 익사 사건, 그리고 가츠키의 살해 사건을 담고 있다. 누군가의 인생이 달라질 정도의 부상, 혹은 누군가의 죽음이, 그 이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에 어떤 그늘을 지우고 있는가를, 그리고 어떻게 극복해 내는가를 미나토 가나에는 <왕복 서간>을 통해 담담히 그려낸다.
글 속에서도 종종 등장하지만 인터넷이 발달한 오늘날 메일로 교류를 하던 방식들을 구태여 편지를 써서 하는 이유는 특히 첫번 째 작품에서 중요하다. 에스코라고 했지만, 사실은 에스코가 아니라, 지아키, 즉 사건의 당사자가 십년이 흘러, 당시 사건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과거의 사건을 추후 탐문하는 방식이기에,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편지글은 내용에 가장 어울리는 방식이 되었다. 또한 그렇게 현대적이지 않은 방식, 자판을 두들겨 쉽게 말을 내뱉는 투가 아니라,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공을 들여 글을 써나가면서,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차분이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고 밝히며, 그것이 전달되어 온다.
편지라는 이제는 사라지려 하는 과거의 소통 방식을 이용하여, 이제는 묻어두고 살아가는 듯한 각자의 과거를 되돌려 보는 것, 그것이 바로 <왕복 서간>의 묘미이다. 그리고 그 묘미는 세 편의 내용을 통해 고양된다.
숙제라는 제목에 어울리게 선생님과 함께 놀러간 피크니에서 우연히 선생님의 부군이 아이들을 구하고 죽고 그것을 각자의 트라우마로 묻어 둔 아이들, 선생님은 오랜 세월이 흘러, 또 다른 선생님의 제자 오바를 통해 그들의 상처를 들여다 보게 한다. 그저 잊혀진 듯 묻어 두었지만, 막상 오바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보았을 때, 그들은 그 과거의 사건에 의해 규정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당시의 선생님이 너무 고마워서, 혹은 그런 희생에 가슴 아파서, 혹은 그런 선생님이 이해 안되서 라면서, 그 상처들이 각자의 삶 속에 또라이를 틀고 있고, 인생의 마지막 무렵, 선생님은 그 남은 또라이마저 풀고 가고자 하는 맘으로 마지막 숙제를 내준 것이다.
세번 째 이야기 십 오년 뒤의 보충수업도 마찬가지다. 그 당시의 기억을 잃은 듯 살아가는 여자, 그리고 그 당시의 일이 자신의 삶을 규정하지 않는다면서도 여자에게서 벗어나 아프리카 오지로 자신을 내몬 남자, 그들은 편지를 통해 조금씩 십 오년 전의 진실에 다가가고, 결국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사실과 함께 각자의 진실을 밝히고, 과거로부터 자유로워 진다.
그렇다, '자유', <왕복 서간>의 주제어를 택한다면 바로 이 '자유'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릴 듯 하다. 마치 죽은 자를 길어올려 그의 한을 풀어주듯, 미나토 가나에는 세 개의 사건 속 인물들을 다시 과거로 소환해 각자가 짊어진 짐을 과거에 풀어놓고 가게 한다. 읽는 독자로서의 묘미는, 동일한 사건이 프리즘을 통해 발산되는 빛처럼 전혀 다르게 보여지는 과거의 사건을 통해 저마다의 진실을 추적해 나가는 그것이다.
이십 년 뒤의 숙제에서, 선생님의 부군이 살려준 아이, 이쿠타 요시타카는, 자신을 살리고 죽은 그 부군의 몫까지 살아달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 조차 자신의 삶에 부담이 되었다고 이제와 고백할 만큼 과거가 짐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말에서, 한 사람이 짊어져야 하는 과거의 무게가 온전히 느껴진다.
첫번 째 작품, 지아키가 분한 에쓰코에서 의혹의 시선을 보내던 친구들도, 그녀와의 왕복 서간을 통해, 과거의 사건을 다시 돌려보고, 그 사건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를 직시하며 과거를 정리하게 되는 것이다.
즉, '자유'의 전제는, 자신이 몸담았던 과거에 대한 직시라는 걸, 점점 과거로 깊어지는 편지를 통해 <왕복 서간>은 말한다. 시간이 흘렀다고, 자신이 경험했던 과거로부터 도망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때론 회피하고 싶은 과거라도 그것을 직시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때만이, 진짜 과거로부터 놓여날 수 있다고 말이다.
이런 과거로부터의 자유는, 정신과 의사들이 주장하는 트라우마의 치료법과도 일맥상통한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기억하는 과거가 틀리듯이, 각각의 인물들은 각자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의 저마다의 짐을 지고 산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들여다 보며, 그 시간을 반추하며, 시인하며, 이제 과거는 그저 덮어둔 상처가 아니라, 풀어내고 흘려보낼 수 있는 진짜 과거가 되는 것이다. <왕복 서간> 속 사건들은 무시무시하지만, 결국은 그조차도 사람 사는 세상에서 흘려보내야 하는 그 무엇이라고 작가는 덧붙이며. 세 편의 후일담들은 그 누구도 추죄하지 않고, 덮어진다. 오히려 사건의 당사자들은 과거의 기억에서 놓여져, 새로운 관계를 모색할 힘을 얻게 된다. 그건 책을 읽은 독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왕복서간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비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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