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눈 감은 길환영 KBS 사장길환영 KBS 사장이 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면담을 요구하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과 생존자 가족들에게 사과방문을 하고 있다.
이희훈
싫든 좋든, 지금 KBS를 상징하는 인물은 바로 길환영 사장님입니다.
길환영 사장님,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은 어느 특정인이나 단체의 폭로와 기자회견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이 매개체가 돼 그동안에 걸쳐 누적된 곪아왔던 KBS의 상처가 터진 것뿐입니다. KBS 기자들은 그동안 취재과정에서 멱살을 잡히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보도본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며 '몇 번 문의'하셨다는 사장께서는 알 수 없을 정도로 KBS 기자들에 대한 모욕과 폭언은 일상화 돼 있었고, 폭행당하고 카메라가 땅에 떨어지는 일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 상흔은 사장 재임 시 제작된 '뉴스 신뢰도 영향력 시청률 1위 KBS뉴스' 포스터를 비롯한 숱한 허상에 가려져 왔을 뿐입니다.
공영방송이자 국내 최대 언론사의 수장으로서, KBS 내부승진의 기록을 갖고 있는 사장께서는 과거 PD로서 프로그램 제작 시 멱살을 잡혀본 적 있으신가요? 뺨을 맞고 발길질 당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철탑위에 농성중인 우리 아빠 살려달라고, 그 얘기 좀 들어달라고 울부짖는 아이들의 손을 잡아 보신 적 있으신가요? 아마도 있었을 것입니다. 없다면 사장께선 시위현장에서 경찰 뒤에만 있었거나, 애써 울부짖는 그들의 시선을 외면하면서 세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 중의 하나라고 자신을 위안하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던 적은 있었을 겁니다.
사장께서도 느끼셨을 그 말할 수 없었던 자괴감,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과 분노가 기자협회의 이번 제작거부로 표출된 것입니다.
후배들이 제작 현장 떠난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보도본부의 일은 잘 모른다'면서도 '대통령 뉴스 20분 룰'을 보도국장에게 직접 언급했다면, 그것이 보도 관련 가이드라인이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우리 스스로 고민하고 실행에 옮겨야할 문제에 대해, 그 시점의 전후가 어떻든 청와대 핵심 당국자는 물론이거니와 국정원으로 판단되는 정보당국 관계자와도 통화했다면, 또 그 적지 않았을 유사한 통화들이, 얘기들이, 그 상황이, 그 모습들이 직간접적으로 보도본부 간부들에게 전파되거나 각인됐다면, 그래서 결국 깊이 신뢰했었다는 전임 보도국장마저 '길 사장은 대통령만 보고 가는 사람'이라고 규정했다면, 공영방송 사장으로서의 처신에 정녕 흠결이 없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사건건 보도 개입' 문제가 불거진 것은 단순히 전임 보도국장 발언 때문에 일파만파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장께서도 잘 알고 계시듯 뉴스는 기자들만의 몫이 아닙니다. 현장에 누구보다도 신속히 도착해 차질 없이 방송할 수 있도록, 뉴스가 무사히 전파를 탈 수 있도록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거의 모든 직종 동료 선후배들의 피와 땀이, 그리고 자부심이 뉴스에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그 뉴스가 멈췄습니다.
총성이 빗발쳤던 이라크를 비롯한 숱한 전장에서, 피폭자까지 나왔던 원전사고 현장에서,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전염병이 창궐하던 재난재해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취재하고 방송했던 모든 이들이, 그동안의 수많은 오욕을 참고 견디면서도 좋은 뉴스 만들어 보겠다던 KBS인들이, 바로 사장님의 후배들이 취재 제작의 현장을 떠난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책임을 지지 않는 방송, 거짓말하고 아부하는 방송은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길환영 사장의 사퇴 조건은 도대체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