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중국 당나라 화가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공자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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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밍쇼의 아시아의 권위주의 폐해와 창조성 결핍에 대한 현상 분석은 부분적으로 설득력 있는 요소들이 있다. 필자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들을 그와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두번째 기고문의 주제가 될 '공감'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그의 주장에 있는 공자와 유가(儒家)에 대한 몇 가지 오해와 논리적 비약을 지적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첫째로, 공자는 진보를 부정하지 않았고, 사회질서 변화에 대한 유연성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논어(論語)』 위정 편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등장한다.
자장이 열 왕조의 일을 미리 알 수 있느냐고 물었다. 공자가 답하기를, "은나라는 하나라의 예법으로부터이니, 줄인 것과 보탠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주나라는 은나라의 예법으로부터이니, 줄인 것과 보탠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주나라의 예법을 계승하는 자가 있다면, 비록 백 왕조의 일이라도 알 수 있다."여기서 공자는 그가 강조하는 주(周)의 예법 역시도 앞서 존재했던, 하(夏)·은(殷)의 제도에서 뺄 것은 빼고 더할 것은 더해서 나온 것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앞으로 올 왕조도 이를 고려한다면, 예견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 공자가 기본정신(仁: 인간사랑)만 잘 보존한다면, 유연하게 질서도 변화·진보될 수 있다고 보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그의 후학인 맹자와 순자도 권위보다 본질을 우선시 했다. 특히 맹자는 공자 보다 더 나아가, 왕 조차도 백성의 뜻에 어긋나면 바꿀 수 있다는 역성혁명론을 주창한 것으로 유명하다.『순자(荀子)』 자도(子道, 자식의 도리) 편에서는, 효(孝)를 강조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의(義)를 좇는 것이지, 부모 그 자체를 좇는 것이 아님을 설명했다. 만약 부모의 명령이 정의와 충돌한다면 절대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점과 그러한 상황에 대한 판단을 개인에게 남겨둔 것이다.
그렇다면, 공맹순 사상에 유연성들이 존재했음에도 아시아적 권위주의 폐해와 창조성 결핍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쨌든 아시아가 누리는 문화양식들이 대부분 서양에서 온 것은 사실이 아닌가?
신밍쇼는 오리진(Origin, 기원)을 따지며, 아시아가 누리는 문화양식들이 서양에서 온 것임을 지적한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지구상에 거의 모든 국가와 지역엔 '순수 오리진'이라고 할 것이 별로 없다. 유럽 대부분 국가들과 미국 지식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에 돌려져야 하며, 고대 그리스 조차도 이집트와 동방에서 흘러온 것들이 녹아있다.
즉, 문화의 가치를 논할 때 중요한 것은 오리진이 아닌 재생산 능력이다. 한 지역에 이미 존재했던 맥락과 유입되는 맥락의 '줄다리기'와 '뒤섞임'의 과정 속에서, 어떻게 문화를 재생산 해나가느냐가 우리 물음의 시작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재생산의 중처적 역할을 하는 것은 '정치'다. 그렇다면, 신밍쇼가 책임을 돌렸어야할 것은 '유가적 관념 그 자체'가 아니다. 이미 존재해온 맥락을, 권위주의적 이데올로기로 변질 시켜온 과거와 현재의 정치였어야 했다.
이제 사유의 해방을 위한 정치가 필요하다사실 피압적 비참함을 논할 것 같으면, 서양의 과거도 만만치는 않아 보인다. 중세에는 플라톤 사상 조차도 종교 이데올로기의 정당화를 위해서 봉사했고, 종교의 권위와 왕의 권위 사이에서 많은 민중들이 스러져갔다. 나치즘과 스탈린주의 앞에서는 많은 민중들이 숙청되었다. 이처럼 서양 역시도 자신들의 맥락을 이어오면서도 물음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기는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신밍쇼의 말에는 분명 일리가 있는 분석들이 남아 있다. 정작 우리는 왜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왜'라는 물음을 해방 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더 이상의 지체는 그의 주장을 우리 스스로 입증해주는 꼴밖에 안 될 것이다.
세월호를 상기해보자.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착하게 따랐을 뿐, 아무런 죄가 없었다. 어른들은 스스로의 말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해왔지만, '가만히 있으라'는 권위의 뒷면에는 어른들의 비겁함, 그리고 무기력하고 뒤틀린 정부 뿐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필자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의 합리성을 의심할 수 있는 세상이, 대통령의 말과 KBS 사장의 주장이 진리로 강요될 수 있는 세상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유의 해방을 위한 정치일 것이다. 우리는 유럽의 일부 국가들처럼, 대학 이전 교육과정부터 철학 교육('윤리 교육'이 아닌 '철학 교육'이다)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의 사유공간을 축소시키는 대학에서의 인문학과 구조조정 정책에 대하여 반기를 들어야 할 것이다. 대중이 예리한 비판정신과 창조적 사고로 무장했을 때, 개인의 '강한 리더십'보다 더 막강한 '강한 민주주의'가 구축될 것이다. 그러한 든든한 토대 위에서는, 어떤 정치인들의 '개인적 일탈'도 쉽게 허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것은 어떤 정치인들에게는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5월 1일, JTBC 손석희 앵커의 오프닝 멘트를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 한다.
"우리 모두는 이 '왜'라는 의문에 대한 답은 아직 모르지만, 그 답을 끝까지 모른다면 이런 비극이 계속 될 수 밖에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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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유 해방'의 정치가 필요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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