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금융 지역이었던 런던시티 외에도 템즈강 하류에 위치한 커네리 워프 지역에까지 세계적인 금융기업들이 진출하고 있다. 템즈강 너머로 오른쪽에 보이는 오이를 닮아 '더킨'이라 불리는 '스위스 보험' 빌딩이 보인다. 이 지역엔 새로 입주하려는 금융 회사들 때문에 공사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주빈
영국은 최저임금 제도와 생활임금 제도를 비슷한 시기에 도입했다. 1999년에 최저임금 제도를 도입했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다시' 도입된 것이다. 1979년 마가렛 대처가 국가 수준의 최저임금 제도를 폐지했는데, 노동당 정부가 1999년에 이를 부활시켰다.
2014년 현재 영국 보수당 정권의 재무장관이 직접 나서 최저임금을 10% 이상 인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영국의 경제 상황이면 6파운드(한화 1만 2400원) 대에 머물러 있는 최저임금을 7파운드 수준까지 올릴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거 영국의 보수당은 최저임금 제도를 폐지하고 재도입에도 반대했지만, 지금은 입장이 다른 것 같다.
영국의 생활임금은 이듬해인 2000년 런던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역 사회의 저임금 노동 문제에 주목한 40여개의 풀뿌리 시민단체, 종교, 노동조합 등은 2000년에 텔코(TELCO, The East London Communities Organization)라는 연대체를 조직하고, 생활임금을 요구한다. 이들은 해당 지역에서 각종 업종의 임금 실태를 조사하여, '매핑 로우 페이 인 이스트 런던(Mapping Low Pay in East London)'이란 보고서를 발표하며 런던 동부지역의 저임금 노동 실태를 고발했다.
10년 전 이 지역은 매우 낙후된 지역 중 하나였고, 빈부격차, 저임금노동 문제보다는 오히려 저개발 지역으로서 슬럼화 문제가 심각했다고 한다. 1980년대엔 지역활성화 대책으로 아일 오브 독스(Isle of Dogs) 지역이 개발되기 시작했고,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개발이 이뤄졌다. 그 결과 현재 런던 동부 지역은 버클레이(Barclays), 시티그룹(Citigroup), HSBC, 메트라이프(MetLife) 등 소위 글로벌한 금융사가 대거 입주해 유럽 금융의 중심이라고 불린다.
문제는 지역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주민, 노동자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역의 개발은 오히려 저임금노동, 노동유연화, 소득양극화 등을 야기하며 지역 주민의 삶을 파괴했다. 시민들은 그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자 했다.
지역 시민단체와 노동조합은 지속적으로 생활임금을 요구했고, 공적 자금이 투입되는 곳에서는 일정한 노동조건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병원, 학교 등으로 생활임금을 적용해야 할 업종과 직종의 확대를 요구했다. 그후 2004년 런던시장 후보 켄 리빙스턴(Ken Livingstone)이 생활임금 제도 도입을 공약했고, 당선되었다.
전물량방식 |
노동조합이 임금인상을 요구하기 위해 이론적 근거로 내세우는 생계비 산출 방식이다. 전물량 방식은 생활에 필요한 전 소비물자(서비스도 포함)를 모두 물량으로 표시하여 그 필요한 물자의 구입가격을 합산하는 방식이며 마케트 바스킷(market-basket) 방식이라고도 한다. - 네이버 경제학 사전 인용 |
런던의 생활임금 제도 역시 계약, 하청 관계에 있는 사용자로 하여금 소속 노동자들에게 런던시가 정한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는 임금'을 주도록 강제하고 있다. 2014년 런던의 생활임금은 시간당 8.8파운드다. 최저임금의 130%정도 되는 수준인데, 우리나라의 최저생계비와 같은 전물량방식과 임금의 상대적 수준을 고려해서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런던시가 산정하여 발표하고 있다.
영국 총리 데이비드 카메론(David Cameron)은 공공부문의 조달 등 입찰에서 특정한 임금 수준을 강제하는 것은 조달과 관련한 EU 규정(EU procurement rules)에 위배된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규정상 사용자에게 임금을 강제하는 것이 필수가 아니라(wouldn't necessarily)는 논리다. 필수가 아니라는 말의 의미가 곧 금지는 아닐 텐데, 총리까지 나서서 내놓은 생활임금 반대 논리는 궁색하다. 총리의 반대 속에서도 현재 런던 생활임금은 민간, 공공부문, 영리, 비영리단체 가리지 않고, 총 214개의 사용자가 시행하고 있다.
2004년 런던에 생활임금을 제도로 도입한 시장인 켄 리빙스턴(Ken Livingstone)은 노동당 소속이고, 현 런던 시장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은 보수당 소속이다. 시민이 스스로 제기한 지역의 문제가 노동조합, 종교, 학생 등 지역 사회의 여러 구성원들과 공유되고 결국 정치권이 수용해서 이윽고 제도화되었다.
시장이 바뀌고, 당이 바뀌어도 그 제도는 유지되고 있다. 심지어 같은 당 총리가 반대하고 있지만 런던시장은 생활임금 제도에 대해서 "생활임금을 지급하는 것은 열심히 일한 런던시민들의 필요를 충족한다, 개인적인 삶의 질을 충족시킬뿐만 아니라 사용자에게도 반박할 수 없는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준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치인을 길들이는 것은 전적으로 유권자의 선택이고,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어떤 제도를 도입하고 유지하며 발전시키는가 하는 문제는 오로지 납세자들이 갖고 있는 '의지'의 문제라 하겠다.
생활임금을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시민 몫다음은 일본이다. 일본에서의 생활임금조례 제정 운동은 '공계약조례'라고 불린다. 공계약은 공공조달로 이해하면 쉽다. 일본의 공계약조례 제정 운동은 1990년대 초반부터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일본도 역시 저임금 문제 해결을 위한 지역 차원에서의 대응이었다. 일본에서는 노다시에서 최초로 공계약조례를 제정했다. 당시 이 조례의 제정은 전국적인 이슈가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일본의 수많은 지방의회가 공계약조례 제정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수많은 지방의회 중 노다시가 가장 먼저 도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노동조합의 노력과 노다시 시장의 강력한 의지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도 공계약조례 제정과 관련해 법리 논쟁이 있었다. 최초 노다시 시장의 입장은 법리 논쟁으로 인해 중앙정부가 공계약조례와 관련한 법령을 정비하면, 그 이행 단계에 맞추어 조례를 제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중앙정부가 노력을 하지 않자, 노다시 시장은 공계약조례를 시 의회에 제출했다. 노다시의 공계약조례는 민간업체로 하여금 소속 노동자들에게 시장이 결정한 최저선 이상의 임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또 관련한 보고 의무 불이행, 허위 보고, 시정명령에 대한 불이행 등의 경우에 해당 계약을 해지할 수 있도록 했다.
경기도는 지난해 '경기도 비정규직 고용개선 종합계획(2013~2017)'을 발표했는데, '공계약(공공조달)을 통한 비정규직 고용개선 유도'라는 이행 방향을 제시했다. 경기도는 공공조달 조례를 제정해서, 비정규직 근로자의 근로조건 및 고용형태 개선 우수기업으로 인증된 기업이 우선 낙찰받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이런 계획을 발표하면서 경기도는 2009년 9월 29일 노다시에서 일본 최초로 제정된 어떤 조례를 사례로 소개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경기도는 현재 경기도의회가 통과시킨 생활임금 조례안을 두 차례나 거부했다. 저임금 노동 문제의 해결은 국가 차원의 대책이 우선되어야 한다면서 생활임금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제도를 도입하고자 했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 노다시의 태도와 경기도의 수동적인 모습은 매우 비교된다.
물론 일본에서도 조례 제정과 관련해 법률적 찬반 논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당시 총리였던 아소 다로가 "지방자치단체의 계약 상대방인 기업 등 사용자는 최저임금법에서 다루는 지역별 최저임금에서 정하는 최저임금을 상회하는 임금을 근로자에게 지급해야 함은 최저임금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답변하면서 논쟁이 일단락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고용노동부도 같은 입장을 밝혔다. 얼마 전 고용노동부는 '생활임금 조례는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고 본다'는 언론보도를 반박하며 생활임금에 대해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고 보고 있지 않으며, 심도 있는 검토 및 논의와 사회적 공감대 형성을 토대로 고려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상 얼핏 보면, 정치권의 결단이 생활임금 제도 도입에 가장 결정적인 열쇠인 것 같지만 아니다. 노동조합과 시민들이 자치에 대한 관점과 고민 그리고 지속적인 문제제기가 생활임금 제도를 도입하게끔 했다. 격한 논쟁 속에서 정치적 결단을, 고용노동부의 입장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시민들의 목소리다.
생활임금은 이미 세계적 흐름, 망설일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