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양팔을 묶은 후 거꾸로 매달아 고문하던 시설. 바닥에는 물고문용으로 쓰이던 물항아리들이 놓여 있다. 당시 수용자들에 대한 고문이 얼마나 혹독했는지 짐작케 하는 현장이다.
박정연
이 사건이 발생하기 약 1년 전, 그는 이유도 듣지 못한 채 군인들에 의해 프놈펜에 있는 수용소로 보내졌다. 과거 평범한 고등학교로 쓰였던 건물이다. 크메르루주는 이곳을 '안전가옥'을 뜻하는 암호명 S-21로 불렀다. 이 감옥은 이곳 지명을 따 '뚜얼 슬렝'이라는 또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독나무가 있는 언덕'이란 뜻이다. 지금 이곳의 공식명칭은 뚜얼 슬렝 대학살 박물관(Toul Sleng Genocide Museum). 현재 춤 메이 노인이 킬링필드의 아픈 기억을 팔며, 살아가는 직장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1978년 10월 28일 일반 죄수로 수감되어 12일 동안 이곳에서 고문 받았다. 그는 자신이 당시 무슨 죄를 지었는지 지금도 모른다. 그 역시 수천여 명에 이르는 일반 수감자 중 한명일 뿐이었다. 수감자 간 대화도 일체 금지돼 다른 수감자들의 신분이나 과거 경력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정치범으로 몰리거나, 전 정권 당시 일했던 공무원, 경찰, 군인이었다는 사실만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그가 상당수 수감자가 반역죄로 몰린 크메르루주 출신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감옥에서 도망친 뒤 한참 시간이 흘렀을 때다.
당시 수용소에는 수십여 명의 간수 군인들과 수감자들을 조사하는 심문관 수명, 그리고 사진촬영 기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수용소의 최고 책임자는 두잇(본명 : Kaing Guek Eav)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그의 얼굴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와 말을 섞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춤 메이는 지난 2009년 6월 크메르루주 특별법정(ECCC)에 증인으로 참석해 뚜얼 슬렝에서 일어난 참상에 대해 진술 바 있다. 교도소장이었던 이 인물은 상부의 지시 따른 것이라며 협의를 강력 부인했지만, 지난 2010년 무기징역을 받고, 현재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이 수용소에서 최소 1만4000명이 고문과 처형으로 목숨을 잃었다. 춤 메이는 고문을 받다 오른쪽 엄지발톱을 뽑히기도 했다. 전기고문은 기본이고, 거꾸로 매달린 채 일명 통닭구이(?)라 불리는 고문도 당했다. 미군용 탄피통이 대변기로 쓰였는데, 분변 처리 과정에 조금이라도 흘리면 그 벌로 바닥을 혀로 핥아야 했다. 배가 고파 쥐나 도마뱀, 벌레도 잡아 날것으로 먹었다. 목이 말라 물을 더 달라고 하면 회초리로 200대를 맞아야 했다. 운다는 이유로 어린 아이들을 3층 발코니에서 그대로 던져 죽이는 간수들의 모습도 봤다.
이곳에 수용된 사람들은 죄가 무엇이든 '앙카'라 불리는 최고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처형당할 운명이었다. 춤 메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매일 새벽, 고문과 질병을 견디지 못해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들것에 실려 나갔다. 죽음은 지옥보다 더 한 감옥을 합법적으로 빠져나가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당시 심문관들은 수감자들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고문을 통해 없던 죄까지 실토하게 만들었고, 거짓진술이라 할지라도 이를 토대로 보고서로 만드는 일이 그들에겐 더 중요했다. 춤 메이 역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진술서에 '미국 CIA 첩자로 일했다'고 쓴 뒤 손도장까지 찍은 상태였다.
진술서 작성을 마친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오직 처형뿐이었다. 진술서를 쓴 사람들이 대부분 다음날 이른 새벽 수용소밖에 대기 중인 트럭에 실려 끌려갔다. 그의 차례가 곧 임박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절체절명의 순간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는 1975년 크메르루주에 의해 프놈펜이 함락되기 전 시내 자동차 공업사에서 기술자로 일했다. 그를 직접 고문했던 심문관이 그 사실을 상부에 보고한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수용소 내 간단한 기계들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당시 감옥 내 고문실 작은방에는 백열등 아래 심문용 책상과 의자 그리고 타자기 한대가 놓여 있었다. 대부분의 진술은 심문관이 타자로 작성한 문서와 수감자의 흑백사진 한 장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타자기가 낡아 고장이 잦았다. 크메르루주가 시장경제를 죄악시해 화폐마저 없앤 상태라 새 타자기를 구입하기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때 그는 고장이 난 타자기를 뚝딱 고쳤다. 그러자 공장 밖 봉제용 재봉틀을 고치는 일이 그에게 맡겨졌다.
2003년, 수용소 간수와 만나 화해한 춤 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