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평전>, 책 표지
민음사
다산 정약용(이하 다산)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존재한 위대한 학자를 열거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전 생애를 통틀어 모두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일표이서라고 불리는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이 있다. 다산은 왕성한 저술 활동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다산의 생애를 들춰보는 것은 조선 후기의 상황, 조선 후기에 태동했던 실학사상 등 조선 후기의 전반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작업이다. 한 인물의 생애를 전반적으로, 약간은 전문적으로 훑을 수 있는 방법은 그 인물의 평전을 읽는 것이다.
최근 민음사에서 <다산 정약용 평전>이 나왔다. 이는 다산에 관한 권위자인 박석무 선생이 집필한 것이라 다른 책보다 풍성할 것 같은 느낌이다.
채 피지 못한 꽃박석무 선생의 <다산 정약용 평전>은 다산에 대한 예찬, 그리고 다산의 재능이 만개하지 못하고 도중에 꺾여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의 정서가 책 전반에 깔려있다. 박석무 선생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산 정약용을 떠올리면 가진 재능을 세상에 다 펼쳐 보이지도 못한 채 귀양살이로 인생을 보냈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정조가 칭찬했던 대로 100년 만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재상의 재목은 채제공을 이어 정약용이 거듭 나왔으나, 그 재목을 알아주는 군주는 정조 이후에 다시 나오지 않았다. (본문 289쪽) 책에서는 다산이 제대로 능력을 펼치지 못한 이유로 인재를 제대로 등용할 수 있는 용인술을 가진 군주의 부재, 서학과 관련된 책을 학문으로만 접했음에도 그것을 꼬투리 삼아 다산을 음해하는 정적들을 꼽는다. 다산의 웅비를 막는 음해 세력만 없었다면, 자신을 알아봐주는 정조와 함께 제대로 된 정치를 했을 것이라고 계속해서 언급한다. 책을 읽을 때마다 문체에서 안타까움이 계속해서 느껴졌다.
과거나 현재나 세상사는 모습은 똑같은 것 같다. 최근 총리 후보자로 지명됐던 문창극씨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대한민국에 수많은 인재가 있을진대 권력자가 제대로 된 용인술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사단이 난 것이다. 또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재가 등용된다 하더라도 자신의 이익을 해칠까 두려운 기득권 세력들이 음해하려 드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다산에 대한 박석무 선생의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떼려야 뗄 수 없는 정조와의 관계다산이라고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그가 군주로 섬겼던 정조다. 다산은 남인 출신이다. 당시 조선은 서인 중에서도 노론이 장악하고 있었다. 노론은 한 왕조의 대통을 이을 세자도 죽일 수 있을 만큼 노론 세력이 강했는데(사도세자가 죽은 일을 뜻함), 이런 상황에서 남인 출신이 입신양명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산이 활발히 활동을 할 시기는 달랐다. 당시 조선의 군주는 정조였다. 정조는 선대에 시행됐던 탕평책을 이어받아 적극적으로 다양한 출신의 인재를 등용했다. 다산은 그 정책의 시혜를 받아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었다. 정조와 같은 군주가 없었다면 다산은 귀양시절 때처럼 초야에 묻혀 글만 쓰고 있을지 모른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다산이었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흠결이 있었다. 바로 천주교와 관련된 자라는 낙인이다. 박석무 선생은 평전에서 다산 정약용은 서학과 관련된 서적을 학문적으로만 접했을 뿐 실제로 천주교를 믿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다산의 정적들은 그 점을 이용해 끊임없이 다산을 괴롭힌다. 정조는 다산을 총애해 정적들의 공격을 막아줬지만 그것도 정조가 살아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정조가 죽기 9년 전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일이 터진다. 천주교 신자가 부모의 신주를 태우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일 이후 조선 내에서 천주교는 극심한 탄압(신해박해)을 받는다. 정조가 있었기 때문에 다산은 무사했다. 하지만 정조가 죽고 1년 뒤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신유박해)을 가한다. 이 일을 계기로 다산을 비롯한 서학과 관련이 있는 자들은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된다.
다산이라는 인물이 아무리 걸출하더라도 그를 기용할 줄 알았던 정조라는 군주가 없었다면 그저 필부로 살았을지 모른다. 다산과 정조와의 관계는 저 옛날 촉한의 유비와 제갈공명처럼 수어지교(水魚之交)의 관계였다. 물이 없으면 물고기가 살 수 없는 것처럼 다산은 정조가 없었다면 싹을 틔어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작금에 가장 필요한 다산 정약용의 목민에 관한 생각관장이 밝게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까닭은 백성들이 자기 몸을 위해서만 교활해져 다른 백성들이 당하는 폐막을 보고도 관장에게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관에서 마땅히 천 냥의 돈을 주고라도 사야 할 사람이다. (본문 232쪽)<다산 정약용 평전>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대목이 있다. 한 고을에서 한 인물이 마을 사람들을 모아 관아에서 행한 부당한 일에 대해 고발하는 일이 있었는데, 우연찮게 그 고을에 다산이 수령으로 부임했다. 행차하던 중에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 다산에게 다가와 그 일을 고하고 자수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때 다산은 "너 같은 사람은 관에서 마땅히 천 냥의 돈을 주고라도 사야 할 사람"이라고 말한다.
처벌을 주장하던 주변 사람들은 아마 이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했을지도 모른다. 이 일화를 읽고 다산에 대해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됐다. 21세기에 이른 현재 대한민국은 내부고발자나 부당한 일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이들을 고깝게 여기는데, 19세기의 인물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지금 목민관의 위치에 있는 자들이 마음에 두고두고 새겨야 할 고사(古事)다.
이런 일화들 외에도 다산이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베푼 일은 허다하다. 더불어 귀양살이를 할 때도 목민에 대한 다산의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다산이 목민에 관해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했던 결과물이 바로 <목민심서>다. 목민관이 가져야할 마음에 관한 책이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박석무 선생은 다산이 마음으로나마 목민의 도를 수행하고 싶었음을 보여준다고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
중요하지만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책<다산 정약용 평전>은 다산의 인생 전반을 다루면서 그 속에 있는 학문적, 정치적 업적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또한 다산의 글을 적재적소에, 그리고 꽤 많은 양을 인용하고 있어서 다산의 다양한 글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더불어 책 말미에 현재 다산의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고 어떤 수준에 이르렀는지 설명하고 있어 다산을 연구하는 학자가 참고할 만한 책이기도 하다.
유익한 책이었음에도 아쉬운 점이 있다. 박석무 선생의 다산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 <다산 정약용 평전> 전체의 문체가 다산을 예찬하려고 하는 느낌이 강하다. 책의 제목에 평전이라는 단어가 들어감에도 다산에 너무 몰입한 탓인지 전적으로 다산의 입장에서 다산의 전기를 서술한 느낌이었다. 다산이 조선에서 비상하지 못한 점은 나 안타까우나, 천주교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정적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다산의 역량 역시 비판적으로 다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다산 정약용 평전 - 조선 후기 민족 최고의 실천적 학자
박석무 지음,
민음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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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팬이라면 꼭 읽어야 봐야 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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