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귀태 할머니 얼굴에는 정선 땅에서 살아온 세월의 흔적이 담겨있다.
김성숙
가격 흥정을 벌이며 손님들과 대화하고 옆에 앉은 동료와 두런두런 수다를 떠는 것은 산골 노인이 장터에서 누리는 큰 즐거움이다. 고 할머니가 자신을 "일흔"이라고 소개하자 변 할머니는 "저이 나보다 겨우 두 살 아래야"라고 맞받아쳤다. 손님이 "깜박 속았다"며 "젊었을 때 미인 소리 많이 들었겠다"고 '아부'를 하자 고 할머니는 활짝 웃었다.
"젊었을 때는 이뻤지. 바람도 피우고 그랬어. 왜 나이를 속였냐고? 장사하려면 거짓부렁도 하고, 공갈도 칠 줄 알고 그래야 돼."정선과 흥망성쇠를 함께 하는 5일장문화관광해설사 서덕웅(69)씨는 산골에 흩어져 사는 화전민이 전부였던 정선의 역사가 탄광이 생기며 완전히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믿을 건 몸뚱어리뿐인 사내들이 모여들어 광부가 되었고, 그들을 상대한 장사치들이 모여 탄광촌을 이뤘다. 정선은 전국 곳곳에서 모여든 이들이 뒤섞여 사는 '팔도공화국'이었다. 5일장이 생긴 것도 탄광이 들어선 뒤인 1966년이다. 장이 흥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가 워낙 험준해서 벼농사 짓기 힘드니까, 정선에서 여자아이가 시집 갈 때까지 쌀 두 됫박 먹고 가면 부잣집이라 그랬습니다. 눈이 높아야 정선사람이라는 말이 있는데, 하늘을 보려면 고개를 완전히 쳐들어야 했기 때문이죠."탄광이 있는 곳마다 기찻길이 지나갔다. 석탄을 실어 나르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정선사람들에게는 장날마다 험한 고개를 넘지 않아도 되는 고마운 교통수단이었다. 석탄산업합리화조치로 80년대 말부터 폐광이 본격화하자, 한때 12만이던 인구는 4만으로 줄었고 장터도 활기를 잃었다. 그러나 서울역에서 출발해 정선5일장을 돌아보고 귀경하는 열차가 관광상품으로 인기를 얻으며 장터는 다시 부흥기를 맞고 있다.
'화티'와 '고콜'이 있는 정선의 옛집"여기 어른들은 '아리랑 해라' 소리 안 합니다. '아라리 한마디 하라'고 그럽니다."서덕웅 해설사는 '아라리촌'의 '아라리'는 정선 아리랑의 옛 이름에서 따왔다고 설명했다. 아라리촌은 정선의 옛 주거문화를 보여주는 곳이다. 너와집, 돌집, 귀틀집, 저릅집 등이 복원돼 있다.
저릅집은 얼핏 볏짚을 엮어 지붕을 만든 초가집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볏짚과는 달리 구멍이 송송 뚫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벼를 재배하기 어려웠던 정선에서는 삼대의 껍질을 벗기고 난 줄기인 겨릅(강원도 방언은 저릅)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