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로 향한 '사슴'의 생활기

[서평] <여행생활자>를 읽고

등록 2014.07.05 17:53수정 2014.07.05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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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생활자  어취선택이 치밀한 보기 드문 여행기다.
여행생활자 어취선택이 치밀한 보기 드문 여행기다. 사흘
시는 곱씹어야 제맛이다. 후루룩 차가운 면발 빨아들이듯 단번에 읽기를 마칠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는 도통 시의 맛을 알 수가 없다. 이해를 하든 공감을 하든 몇 번이고 읽어봐야 한다. 그만큼 공을 들여야 압축된 언어에 뭉쳐진 통찰을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일상 언어가 아닌 데다가 도통 모를 말만 이어지는 시를 반복해서 읽기가 쉽지만은 않다. 어지간한 애정과 시인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시집을 집어들었다가 도로 책장에 고이 모셔두는 일도 허다하다.


내 얘기다. 시를 향한 허영을 채워보겠노라고 도전해보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능력부족. 자인하고 시집을 꺼내들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의외로 세상에는 시와 시를 닮은 글들이 많다.

이 책 <여행생활자>도 그러하다. 풍경과 여정이 없지는 않으나 자신의 마음과 감정이 더 중요하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때때로 기록의 문장이 아닌 시구가 툭툭 불거져 나오기도 한다. 좋게 보면 풍부한 감성의 범람이요 고깝게 보자면 습작의 기억이다. 때문에 여행지가 바뀌고 만나는 사람이 달라지고 먹는 음식이 새로운데도 같은 내용을 몇십 분 전에 읽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실제로 이 책은 화장실에 두고 틈틈이 힘주며 읽어나갔는데 굳이 책갈피가 필요하지 않았다. 마음 내키는 대로 네팔에서 파키스탄으로 훌쩍 뛰어 넘어도 혼란스럽지 않았고 어색하지 않았다.

그 만큼 이 책에는 작가의 묵직한 감성이 진하게 배어 있다. 또, 그 감성은 대체로 예민하고 여리고 아낌이 없다. 나에게는 없는 공감과 통찰의 능력이 작가에게는 생활일 테지. 이런 류의 글쓴이들을 부르는 나만의 호칭이 있다. '사슴'. 현실에 발을 딛고 살면서도 그 눈망울이나 움직임부터 훌쩍 비현실감이 들게 하는 사슴 말이다. 낯설고 고되고 더럽고 아픈 여행을 하면서도 제 마음과 느낌에 따라 백일몽을 꾸고 꿈풀이를 기록의 언어가 아닌 시의 언어로 풀어낸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책은 분명 여행기지만 이 책대로 여행지를 찾아갈 엄두를 내지는 못한다. 여행 정보란 게 애초에 없다. 버스는 탔다는데 얼마에 어디서 탔는지 말하지 않는다. 먹는 거라고 빵에 짜이 뿐이고 숙박비는 얼마인지도 모르겠고 국경을 넘는다는데 환율이란 게 있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생활정보는 매말랐다. 보통의 여행기처럼 나 따라 해봐라 식은 결코 아니다.


먼 타국에서 풀어내는 시와 꿈을 닮은 자기 속 꺼내 보이기. 읽으면 읽을수록 힘들어질 법하다. 시집이라고 집어 든 게 아니고 여행기인 줄 알고 집어 들었다면 말이다. 그런데도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내고 또 한 번 읽어도 좋겠다 싶었던 건 색다른 공간과 그 공간을 밝고 시원하게 보여주는 사진 덕분이다.

책 초반에 사진을 봤을 때는 둘이서 여행을 했구나 싶었다. 글과 사진이 너무나 다른 느낌이었다. 여행기가 시라면 사진은 장쾌한 풍경은 크고 환하게 잡아 놓았고 수줍은 현지인의 웃음도 살갑게 잡아내는 게 말랑말랑한 소설 같았다고나 할까. 사진에는 분명 엄연한 현실이 크고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카메라 뒤에 서 있는 긍정 가득한 생활인의 모습이 보였다. 글과 사진은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오기 힘든 다름이 있었지만 그 다름이 공존할 수 없는 건 아닐 것이다.


그래 이 책은 사슴이 쓴 게 맞다. 하지만 분명 풀 뜯고 물 마시다가도 육식 동물의 울음이 멀리서 들리면 화들짝 놀라 달아나 생존하려는 사슴이 썼다. 어찌 보면 비현실적인 움직임과 눈망울이란 게 사슴의 선택이 아닐 텐데 자꾸만 비현실적이라고만 하면 억울할 법도 하다. 곱씹으면 제 맛을 알게 되는 순간이 있을 테지.

후에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어 보려 한다. 눈이 수북이 쌓여 길은 막혔으되 세상은 더 없이 고요하고 환한 겨울날에.
덧붙이는 글 아날로그캠핑 블러그에도 게재하였습니다.

여행생활자 -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여행기

유성용 지음,
사흘, 2012

이 책의 다른 기사

방랑 시인, 귀환하다

#여행생활자 #강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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