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다가도 불고기라면 벌떡 일어나는 아이였다
commons.wikimedia.org
나는 원래 아버지를 닮아 뭔가에 쉽게 질리지 않는 성격이지만,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은 특히 더 그랬다. 워낙 손이 큰 어머니는 음식을 한번 하면 몇 끼는 먹을 만큼 많은 양을 만들어서 가족들의 원성을 듣곤 했는데, 항상 나만 예외였다. 소풍 전날이면 갖가지 김밥 수십 줄이 쏟아지고, 한 솥 가득 카레를 만들어서 사흘 내내 먹어야 바닥이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도 식구들이 "도대체 이 많은 걸 누구 먹으라고 만든 거냐"고 장난 섞인 푸념을 할 때, 나는 늘 거기에 동참하지 않았다. 하루 세 끼를 똑같은 반찬으로 먹어도, 어머니가 해준 반찬이라면 최고로 맛있는 걸 어쩌겠는가.
불고기는 더 그랬다. 어머니가 불고기를 한 날에는, 아침에 그걸 먹고도 저녁에 또 먹으려고 일부러 일찍 집에 가기도 했다. 어린 꼬마 시절에는 "불고기!"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곤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장난 삼아 그렇게 나를 깨우기도 했다. 실제로 불고기 반찬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면 환호가 절로 나왔고, 만약 아니었으면 다음 날 요리를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에야 다시 잠들었다.
일곱 살 땐 밥상 위에 올라온 불고기를 보고 너무 좋아서 제대로 씹지도 않고 급하게 삼킨 나머지, 소화가 안 돼서 밥상에 그대로 토해버린 적도 있다. 안타깝게도 그때는 불고기를 접시에 덜어놓지 않았고 프라이팬째 올려놓고 먹던 터라, 저녁식사의 메인반찬이 고스란히 주방 싱크대로 퇴장해야만 했다. 이 사건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식구들한테 미안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나날이 기운 집안 형편... 점점 사라진 어머니 자리
나쁘지 않았던 집안 형편은 내가 커 갈수록 나날이 기울어갔다. 결국 어머니도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왔고,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때쯤 빚을 내서 작은 식당을 차리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침 일찍부터 가게를 열고 저녁 늦게까지 일했다. 당시 가게와 집은 거리가 상당히 멀었고, 어머니가 일을 마치는 시각은 버스와 지하철이 끊긴 뒤였다. 택시를 타고 오기엔 교통비가 감당이 안 돼, 결국 어머니는 한 푼이라도 더 벌고 아끼자는 생각에 식당에 딸린 방 한편에서 잠을 잤다.
그러다보니 어느샌가 점점, 가족의 풍경에서 어머니의 자리가 사라져갔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사실 빈자리가 컸음에도 다들 각자의 일상에 바빠서 어머니의 부재를 실감할 틈조차 없었다고 해야겠다. 그러다가 한 달에 두어 번, 미리 전화를 하고서 주말 낮에 잠시 집에 들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직접 요리한 반찬을 가득 들고 와서, 사이가 소원해진 아버지와 어색한 대화를 짧게 나누고, 내게 용돈을 쥐여주고 떠나는 일이 반복됐다. 그때 가족 사이에 생긴, 보이지 않는 균열이 점점 벌어지는 것을 느낀 사람은 아마 어머니뿐이었을 것이다. 그 외로움을 견디고자 2주에 한 번이라도 굳이 나를 보러온 것인지도 모른다.
2003년이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고, 집 안은 늘 텅 비어 있는 날이 많았다. 나는 매일 아침 7시까지 등교하고 밤 10시에 하교했다. 아버지도 일을 마치고서 잠만 자러 들어올 때 겨우 얼굴을 보곤 했다. 평생 해오신 안경가게가 나날이 더 힘들어지는 것을 아버지의 굳은 표정에서도 읽을 수 있었다.
"아, 왜 이래요... 돈 주고 가면 나중에 사먹을게요"6월의 첫째 주 일요일 아침,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평소와 다르게 미리 연락을 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집에는 나 혼자였다. 평일에는 학교에 매여 사느라 나도 좀 피곤했다.
"잠깐 나갈래? 너, 회 좋아하잖아. 근처에 횟집 생겼던데 먹으러 가자.""아, 갑자기 와서 왜 이래요. 모처럼 잠 좀 푹 자려는데…. 돈 주고 가면 내가 나중에 사먹을게요."한 주에 한 번뿐인 일요일 아침의 늦잠을 방해받은 나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덜컥 짜증부터 내고 말았다. 고3이라는 신분이 그래도 된다는 면죄부를 준 것처럼, 나긋한 목소리로 몇 번이나 외식을 권하는 어머니를 끝내 차갑게 뿌리쳤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간절했다는 것을 그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회 안 먹고 싶어? 그러면 나가서 치킨 사올까?""아으, 정말…. 됐다니까요."계속 짜증만 내는 나를 설득하려는 시도는 결국 한숨으로 끝이 났다. 어머니는 못내 아쉬운 듯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용돈 몇 만 원인가를 내 책상에 올려두고, 느린 발걸음으로 가방을 메고 다시 집을 나섰다. "다음번에 올 때는 반찬 뭐 해줄까" 하고 묻는 질문에도 나는 퉁명스럽게 "불고기" 하고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대문을 나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고서야, 내가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때라도 어머니를 붙잡고 미안하다고, 나가서 무엇이든 좋으니까 같이 사먹고 들어오자고 말했어야 했다. 물론 그때는 그러지 못했다. '이 순간을 후회할 날이 올 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는데도 말이다.
그날 본 어머니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